▲ 1936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는 이순금 선생(1912~?). 국사편찬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이순금과 일제강점기 감시대상인물카드는?

일제강점기 경찰은 독립운동가를 감시하기 위해 체포된 이들의 인물사진과 이력, 그리고 범죄 사실을 적은 신상 카드를 만들었다. 거기엔 출생일과 출생지 그리고 주소지뿐 아니라 신장(키) 치수까지 적어 놓아 한눈에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이 카드는 검거될 때마다 만들어졌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6천264장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80년 초 치안본부에서 넘겨받아 기록으로 정리했는데 동명이인과 중복된 사람을 구분해 보니 사람수로는 4천823명이다. 일제강점기 35년 동안 만들어진 카드 총 숫자는 7만5천장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0분의 1도 남아 있지 않은 셈이다.

확인된 것들로만 통계를 내 보니 조선공산당 재건그룹 사건으로 체포된 뒤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한 오성세(1907~1932)가 7장으로 제일 많고, 6장이 있는 독립운동가는 6명, 5장이 24명이다. 그리고 감시카드가 만들어진 여성은 179명이고 카드 숫자는 238장이다. 그중 여성독립운동가로 가장 많은 5장의 카드가 만들어진 이가 이순금과 박진홍이다. 그리고 둘은 공교롭게도 동덕여고보를 함께 다녔던 동기였고, 같은 조직에서 활동했으며 친일언론이 자극적으로 써 내려간 스캔들의 양쪽 주인공이었다.

울산 언양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해 보니

이순금은 어릴 때부터 매우 유복했다. 어머니 김남이가 아버지 이종락을 만나 혼인했을 때 세 번째 부인이라 서녀 신분이었지만 보통 겪을 만한 차별이 없었다. 이복 오빠 이관술과는 10살 차이로 터울이 컸고 사는 집도 달랐지만 사이가 나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언양에서 울산읍내로 들어가는 새고개에 주막을 열었던 어머니의 사업 수완이 워낙 뛰어나 큰돈을 모았으니 집이 풍요로웠다.

부모가 끔찍이 아끼는 딸이라 신식 교육을 시켰고 언양에서 보통학교를 나온 뒤 1928년 서울에 있는 실천여학교에 입학해 유학길에 올랐다. 어머니 김남이는 딸을 혼자 보내지 못해 종로구 익선동에 집을 장만한 뒤 아예 함께 살았다. 그리고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유학한 이관술이 1929년에 귀국해 지금의 서울지하철 안국역 근처에 있던 동덕여고보에 교사로 부임하자 그 학교로 전학까지 시켰다.

그때 만난 친구들이 바로 이효정·이종희·박진홍이다.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천성이 쾌활하고 넉넉한 형편 때문에 구김살이 없었던 이순금은 친구들을 종종 집으로 초대했다고 한다. 고향에서 보내온 비싼 과일들도 나누어 먹으면서 웃음 지으며 재잘거렸던 그 시절인 그녀의 인생 속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1930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1주년을 맞아 펼친 ‘백지동맹’ 사건부터 상황은 완전은 달라졌다.

학생독립운동에서 여성 사회주의자로

이순금과 친구들이 이제 몇 달 뒤면 졸업반이 되는 때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경성까지 닿은 뒤 대부분 학교에서 만세운동에 나설 조짐을 느끼자 일본 당국은 강제로 휴업이나 방학에 들어갔다. 두 달 뒤 좌우 여성독립운동가들이 하나로 뭉쳤던 근우회와 연결된 여학교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백지동맹은 그 연장선이었다. 일제 당국에 대한 항의가 첫 번째요, 일제에 굴복한 학교당국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이 투쟁에 참가하면서 이효정·박진홍 등 동기들과 함께 경성RS독서회에 참가했다. 단순한 독서회가 아니라 사회과학도서를 함께 읽는 사상연구회로 여학생운동을 밖에서 이끈 근우회를 고리로 이종림(李宗林)과 이평산(李平山) 등이 지도했고 동덕·휘문·중앙·제2공립·법정학교 등 7개 학교 학생들이 참가했다.

그러던 중 1931년 6월 초 또 한 번의 동맹휴업이 경성지역 10여개 학교에서 벌어진다. 이번에는 학내 문제를 해결하고 일본인 교육과의 차별을 시정하라고 요구했다. 동덕여고보 학생들도 재단과 교장을 향해 학교운영 개선을 요구했다. 동맹휴업은 학교 안에서 밖으로 확산했고, 참가 학생들이 모두 징계를 받자 끝내 재단 이사장의 집 앞 단식농성까지 한 달 동안 지속됐다.

일제 당국은 잇단 학생동맹휴업의 배후를 찾겠다고 혈안이 됐다. 그 결과가 바로 경성RS독서회에 대한 수사와 대규모 체포였다. 이순금과 동기들 모두 이때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어야 했다.

어머니 죽음 뒤 오빠 이관술과 동지로

동맹휴업이 끝난 즈음 이순금의 어머니 김남이가 서울 종로구 익선동 집에서 운명했다. 딸을 지극한 정성으로 아꼈던 어머니의 죽음은 무척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 이종락이 서울에 올라와 아내를 고향 울산으로 운구했고, 본가에서 소유한 땅에서 명당자리를 골라 안장했다. 당시뿐 아니라 지금으로 봐도 파격적으로 봉문 앞에 ‘김남이의 묘(金南伊之墓)’라고 새길 만큼 마음을 다했다.

이순금은 어머니의 죽음 뒤 오빠 이관술과 더 가까워졌다. 배다른 남매를 넘어 사회주의 계열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동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33년 2월 남매가 동시에 첫 번째로 일제감시대상카드가 생긴 경성반제국주의동맹 사건으로 체포됐다.

이관술이 주모자로 송국될 때 이순금은 한 달 만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그 뒤 곧장 이재유를 만나 경성트로이카 그룹으로 경성고무공장 여공들 속에서 들어가 적색노조 파업을 했다. 1933년 4월부터 별표고무를 시작으로 6월1일 편장제사를 거쳐 8월부터 중앙상공회사(별표고무 8월17일), 소화제사(8월22일), 고려고무(8월 하순), 조선견직(9월7일), 서울고무(9월19일), 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9월21일)으로 연쇄파업이 이어졌다. 이순금은 동덕여고보 동창 이종희·이효정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의 파업위원회 ‘레포’(연결책)로 활약했다.

하지만 1934년 1월 체포돼 새로운 감시카드가 더해졌다. 그리고 7월17일 예심 재판을 치를 때 카드 한 장이 더해졌다. 뒷면에 적힌 검거기관을 보면 경기도 경찰부가 적혀 있다. 재판을 마치고 풀려난 뒤엔 반제동맹 사건을 겪고 출소한 오빠 이관술과 이재유, 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의 운명적인 만남을 잇는 징검다리가 됐다. 이제 남매 모두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국내에서 가장 치열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는 동지로 관계가 깊어진 것이다.

고문으로도 꺾이지 않은 한결같은 의지

이순금의 네 번째 신상카드는 1936년(소화 11년) 6월에 만들어졌다. 경성트로이카 활동과 이재유 도피 등의 죄목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2년형을 언도받을 때다. 1935년 12월20일에 징역 기간이 확정된 뒤 수감될 때 작성됐다.

체포부터 형이 확정될 때까지 일제 경찰에게 혹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해방 후 군사독재시절 공안부서로 계승될 만큼 반인권적이고 살인적인 고문이다. 특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것은 온갖 수치와 모멸감을 동반했다. 그러나 그런 고문으로도 이순금이 품은 항일과 혁명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것은 다섯 번째 신상카드가 만들어진 앞선 체포와 수감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 직후인 1938년 4월 일본 경찰에 다시 한번 검거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때 일경이 덧씌운 죄목은 항일운동자금 조달혐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 아버지가 딸을 위해 당시 서울에서 큰 집 한 채를 살 만큼의 유산을 남겼는데 그것을 운동자금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순금은 본인에 대한 마지막 신상카드가 만들어진 두 달 뒤 6월, 경성지법에서 예심 면소된다. 그 이후로는 1939년 경성콤그룹에 참여했고 1941년 9월 일본 경찰의 수배 명단에 핵심 체포 대상으로 올랐지만 감쪽같은 위장 도피생활을 계속했다. 따라서 소재지 불명으로 기소 중지돼 해방 때까지 암약했다.

해방, 기쁨은 잠시 … 북으로 망명하다

해방이 되자 일경의 수배를 피하며 박헌영·김삼룡·이관술 등을 연결했던 이순금은 당당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45년 8월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9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국인민대표자회의에 여성으로는 유일하게 인민위원 55인으로 선정됐다. 그 뒤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대표위원, 1946년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을 거쳐 남조선노동당 중앙위원 및 부녀부장을 맡았다.

그중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은 이순금이 가장 많은 애정을 가졌던 역할이었다. 1946년 발간한 <여성공론> 창간호에 기고한 글을 보면 “과감히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만 자기의 지위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며 여성동포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무엇보다 선명하기 때문이다.

▲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이순금의 가슴 벅찬 행보는 어느새 미군정과 친일 잔존세력의 이념 공격에 막혀 멈추게 된다. 조선공산당의 핵심이던 오빠 이관술에게 미군정은 위조지폐를 만들었다고 거짓 죄명을 씌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관술의 구명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고, 무고함을 알리는 장문의 글까지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남이 아니라 북으로 망명을 결정했다. 게다가 남쪽에서는 결코 그녀의 독립운동을 국가가 인정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진 상태다. 안타깝게도 이순금과 똑같이 5장으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가 많은 박진홍도 같은 신세이니 이 또한 현대사의 헛헛한 비극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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