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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들의 마을, 아시시 가는 길
▲ 최재훈 여행작가

피렌체역에서 기차로 2시간반 정도를 남쪽으로 달리면 성자들의 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은 아시시라는 동네에 닿는다. 피렌체와 로마 중간 어디쯤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시골마을 아시시로 가는 기차는 고속열차가 없다. 대신 ‘레지오날레‘라는 우리네 새마을호 비슷한 열차가 하루 몇 차례씩 오간다. 레지오날레는 특이하게도 표를 끊으면 출발지와 종착지, 티켓날짜는 나오는데 열차 시간과 좌석은 나오지 않는다. 처음 표를 받으면 살짝 당황스러운데 무시하고 타려고 했던 시간에 그냥 타면 아무 일도 없다. 그날 안에 아시시로 가는 열차를 시간 되는 대로 타서 앉고 싶은 곳을 찾아서 내키는 대로 앉으면 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모양이었다. 붐비는 때가 아니라서 열차는 정말 텅텅 비어 있었다. 네댓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열차 한 칸을 전세라도 낸 듯 이용하는 꼴이다.

1시간반쯤 지난 어느 역에 기차가 섰다 출발하자, 입구쪽에서 난데없는 아코디언 소리가 들린다. 행색 남루한 아저씨 한 분이 아코디언 바람통을 늘렸다 좁혔다 하며 승객들과 애써 눈맞춤을 하며 지나간다. 연주와 잔돈을 맞바꾸는 그런 분이시다. 그새 승객은 늘어서 열댓명이 돼 있었지만, 연주에 대한 호응은 신통치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곁을 지나가는데 절 대로 전 술 냄새가 훅하고 콧속을 파고들어 온다. 아코디언맨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굳이 내 쪽으로 어깨를 기울여 보는 게 느껴지지만, 마침 잔돈도 없고 해서 다른 승객들처럼 나도 그냥 보내드리고 만다. 이런 상황이 지나가면 언제나 그렇지만 한동안은 마음의 뒤끝이 남는다. 성자들의 마을로 가는데 마음이 이리 박해서야 쓰겠나 싶은 생각이 아코디언 선율처럼 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뒤숭숭하던 차에 마침 내릴 때가 됐다. 기차역에 내려 2유로짜리 버스를 타고 10분쯤 가다 보면 뒷동산 정도 되는 언덕을 둘러 자리 잡은 마을이 보인다. 언뜻 보기엔 평범한 시골 마을인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곳이 가톨릭 성인 중 한 명인 프란치스코 신부와 클라라(키아라) 성녀가 묻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꽤 의미 있는 인물들이라 성지순례 여행자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인 모양이었다. 한국 교구에서 나눠 준 2020년 달력의 1월 표지 모델이 이곳 아시시에 있는 성프란치스코 성당인 것만으로도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아시시에서 이박 삼일, 태어날 때부터 신자였던 아내는 이곳에서의 시간에 제법 기대를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성당이나 성령의 은혜에서 몇 발자국쯤 벗어나 있는 나는 별 일 없이 지낼 생각이다.

아시시 근처에는 성당이 100개 정도 있다고 한다. 인구 3만명의 작은 마을치고는 성당 자체가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이 성당들 하나하나가 또 만만치가 않다. 마을을 바라보고 왼쪽 언덕 끝부분에 자리 잡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오른쪽에 터를 잡은 성 키아라 성당과 성 루피노 성당. 이렇게 3개가 대표적인 성당이다. 땅이름을 붙이지 않고, 3명의 성인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이곳을 성지로 만든 주인공은 성 루피노 주교로 알려져 있다. 서기 238년에 있었던 일이니 1천800년 전의 일이다. 성 프란치스코와 성 클라라는 13세기 사람들이다. 잘 나가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프란치스코가 계시를 받아 집을 나와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면서 이곳 아시시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그의 말씀에 감화를 받은 귀족 집안 딸 클라라가 프란치스코의 길을 따라 역시 수도자가 돼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 모두 평생을 청빈하게 살면서 가난한 이들을 돌봤던 ‘가난한 자들의 성인’으로 천주교인들에게는 칭송을 받는 인물이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 안에 전시돼 있는 프란치스코가 입었다는 누더기 수도복이 그에 대한 모든 평가를 대신해 주고 있다. 누더기도 그런 누더기가 없기 때문이다.

성당 건물도 검소하기는 마찬가지다. 밖에서 보면 세 성당이 엇비슷하게 생겼다. 별다른 장식 없이 벽돌로 차분하게 쌓아 올린 본당 건물과 그보다 조금 더 높게 올린 종탑을 끼고 있는 모습에서 이곳에 묻힌 성인들의 정신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성프란치스코 성당 내부 벽을 돌아가며 그려져 있는 여기저기 지워지고 뜯긴 낡은 프레스코화가 화려하다면 화려하다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식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여유 있게 아침을 먹고 성 키아라 성당과 성 루피노 성당을 본 뒤, 점심으로 충전하고 반대편으로 움직여 성 프란시스코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시간이 좀 남는다면 해가 지기 전에 조금 서둘러 아시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로카 마조레 요새를 오르는 게 탁월한 선택이다. 중세 요새를 배경으로 두고 내려다보는 저녁노을은 모르면 몰랐지, 알고 나면 못 본 게 무척 후회됐을 그런 풍광이기 때문이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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