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관술 선생(1902년~1950년). 국사편잔위원회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부유한 지역 명문가문 출신으로 동경유학 그리고 귀국 후 민족교육을 앞장섰던 존경받는 선생님이던 그는 왜 항일투쟁에 앞장선 노동혁명가로 삶을 송두리째 바꾸었을까.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은 일제강점기 후반 대표적인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직후 첫 번째 정치여론조사에서도 대표적인 정치인으로 꼽힐 만큼 신망을 가득 받았다. 하지만 남과 북으로 나뉜 이념전쟁에서 남한 사회주의를 이끌던 이관술은 미군정이 조작한 사건으로 체포, 수감됐다. 결국 70년 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규모 학살의 첫 과녁이 돼 운명했다. 비운의 혁명가로 잊혔다 다시 주목하게 된 이관술. 그의 치열했던 삶으로 들어가 보자.

약소민족의 청년, 민족교육가를 꿈꿨지만

이관술이 근대교육을 받은 것은 1923년 22세 때 서울 중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면서다. 지역 명문가문에 재산도 넉넉했던 집안의 기대를 안고 늦은 나이에 들어간 고보에서 수재로 꼽히면서 당시 최고 인재만 지원했다는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합격한다. 어쩌면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현실과 거리를 두고 동경 유학생 신분의 엘리트로 꽃길을 걸을 것만 같았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유학생들은 1920년대 초 점점 영향력이 커져 간 사회주의 사상 아래 조선공산당이나 고려청년회에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조선인노동조합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관술은 유학시절 내내 사회주의를 알았지만 자신을 이상적인 민족주의자로 한정 지었다. 약소민족 청년으로 민족에 도움이 되겠다는 소극적인 태도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1929년 유학을 마친 뒤 고국에 돌아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한 첫해부터 완전히 뒤바뀌게 됐다.

동덕여고보에서 사회주의를 선택하다

이관술은 1932년까지 만 4년 동안 길지 않은 교사생활을 했다. 역사와 지리 과목을 가르쳤는데, 유학생 출신이라지만 학생들이 ‘물장수’란 별명을 붙일 만큼 친근한 선생님이었다. 늘 겸손한 품성과 진지한 교육열로 이후 학생 독립운동에 나섰던 학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그 제자들이 이효정·박진홍·임순득·김재선·이종희 등으로 졸업 후에도 독립운동에 나섰던 동량들이다.

그들 모두를 변화시킨 사건은 부임 첫해 11월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었다. 광주에서 시작해 서울로 번져, 학생들이 궐기와 시위를 준비했다. 그런데 그동안 민족계몽을 앞세워 학교를 운영해 왔던 인사들이 일제의 압박에 굴복해 휴교를 하고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이때 이관술은 일제와 타협하는 민족주의에 크게 실망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에 맞설 방식을 고민하면서 사회주의로 발걸음을 옮기게 된 것이다. 유학 시절 역사연구의 한 방법론으로 여겼던 유물사관을 상기했고 교사 신분을 넘어 사회주의 계열 실천활동에 나서게 됐다. 먼저 학교 안에선 학생독서회를 지도했고, 밖으로는 ‘경성반제국주의동맹’을 결성했다. 반제동맹은 1931년 9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만주침공에 반대하는 명분을 걸고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운명의 동지 이재유와 함께한 ‘경성트로이카’

이관술은 경성반제동맹 결성부터 깊게 개입했고, 재학생과 졸업생을 모아 비밀독서회를 연달아 만들었다. 그러나 1933년 초 일본 경찰에 활동이 발각됐고 연행자 중 43명이 정식으로 법원에 송국됐다. 이때 이관술도 첫 체포와 구속을 겪게 됐다. 주모자로 분류된 이관술은 혹독한 고문을 겪어 병보석으로 가석방된다. 하지만 출소할 때 기쁨은 잠시였고 발걸음이 무척 무거웠다. 4월에 출소할 때 ‘경성트로이카’와 이재유라는 인물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동생 이순금 역시 이재유 그룹에 속해 활동하다 옥고를 겪었다.

이재유는 일제강점기 중·후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관술은 이재유보다 세 살 더 많았지만 사상과 실천면에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1934년 9월 운명처럼 만난 뒤 경성트로이카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동지였다.

‘트로이카(тройка)’란 삼두마차를 뜻하는 러시아 말로 상부의 지시만 받는 세포조직이 아니라 3명씩 소그룹을 지어 수평적 관계 속에서 토론하고 결정하는 형태로 노동자와 농민을 조직했다. 이재유는 트로이카 방식으로 분열된 사회주의 그룹을 통일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할 목표를 제시했다. 트로이카 지도부의 한 자리는 경도제대를 유학했던 박영출(朴英出)이 채웠다. 하지만 1935년 1월 박영출을 비롯한 42명이 일제 경찰의 대규모 검거 과정에서 체포됐다.

이관술은 이재유와 함께 검거를 피해 폭설에 덮힌 산중에 들어가 은거 후 신분을 위장해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에 정착했다. 지역주민뿐 아니라 주재소 경찰들까지 믿을 만큼 완벽하게 신분을 감춘 뒤 18개월을 은거했다. 그곳에서 <적기(赤旗)>를 발간했는데 여기에 내세운 15가지 슬로건은 지금과 비교할 때도 혁신적이었다.

① 노동자 파업투쟁의 자유, 즉 파업에 대한 경찰과 군대의 탄압 절대 반대 ② 노동조합, 그 밖의 모든 노동자 조직의 자유 ③ 노동자를 탄압하는 모든 악법 반대. 특히 치안유지법·출판법·폭력행위취체령, 제령 7호 반대 ④ 모든 정치범 즉시 석방, 사형제도 반대 ⑤ 노동자의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 정치적 집회·데모의 자유 ⑥ 일체 경영위원회 창설의 자유, 프롤레타리아 자위단 창설의 자유 ⑦ 노동자에 대한 일체의 봉건적·기숙사제적 속박 반대 ⑧ 하루 7시간(1주 40시간) 노동제 획득 ⑨ 야전적 노동강화, 대우 개악, 임금인하, 시간연장 등 부르주아적 산업합리화 절대 반대 ⑩ 동일노동에 동일임금제 획득 ⑪ 부인·아동의 연기계약(年期契約)제와 매매제 절대 반대 ⑫ 모든 노동자 조직 안에 좌익 결성 ⑬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 강화 ⑭ 경성을 아우르는 산업별 노동조합 촉성 ⑮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촉진이다.

수배·변장의 달인 이관술, 빗자루를 타고 날다

<적기> 3호의 등사를 막 끝낸 다음날 1936년 12월25일에 이재유가 집을 나섰다가 주변에 잠복 중인 일본 경찰들에게 체포됐다. 이관술은 약속대로 미련 없이 도피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 이재유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일본 경찰의 수배망이 더 조여지는 상황에서도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끈질기게 이어 갔다.

1939년 1월 여동생 이순금을 만난 뒤 전국을 돌면서 김삼룡(충주)·정재철(부산)·권우성(마산)·이기성(부산) 등을 만났다. ‘경성콤그룹’ 이름을 걸고 새로운 기관지 <꼬뮤니스트>(1939년 9월)를 발간했다. 기관지 출판과 인쇄는 이순근과 안동 출신 권오직이 했고 배포는 이주상·조복례·여운철 등 각 지역의 공장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이뤄졌다.

이관술이 헌신을 다했던 경성콤그룹은 일제강점기 말 다양한 소규모 사회주의 계열 항일조직이 계속 만들어지고 해체되길 반복하는 와중에서 독보적이었다. 특히 국내로 따지면 독립운동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이관술은 이때 변장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국에서 발견된 기사는 나와도 경찰에 체포됐다는 소식은 없었다. 경인지역과 남부 및 북부지방까지 조직을 확대한 뒤 박헌영을 영입한 후엔 아예 함경도로 올라가 탄광과 비료공장에서 노동운동을 지도했다. 그가 다시 체포된 것은 수배된 지 6년 만이었다. 수감 중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1943년 말 3개월간 가석방돼 고향 울산에 내려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몸을 추슬렀다. 하지만 병보석 기간이 끝나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때부터 이관술이 축지법을 쓰거나, 빗자루를 타고 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 뒤 더욱 철저한 변장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를 오가며 활동을 잇다가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후 미군정 놓은 덫에 걸려 다시 감옥으로

8·15 광복 후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입맛대로 38선을 기준으로 남북 분할 점령안을 세웠다. 여운형·조만식 등이 이끈 조선건국준위원회(건준)가 구성돼 전폭적인 지지 속에 활동했고,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정부형태로 구성했다. 이관술은 중앙인민위원 및 선전부장에 선출됐다. 하지만 미군정은 건준도 인민위원회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 당시 이관술의 정치적 위치는 중도우익성향의 단체인 ‘선구회’에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에 이어 5위였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이관술은 조선공산당에선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박헌형에 이은 핵심지도부였다.

조선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갈수록 높아지자 미군정은 ‘조선정판사 화폐위조사건’을 기획했다. 조선공산당이 적산건물을 매입할 때 건물 1층에 있던 인쇄소가 정판사다. 정판사를 인수하기 전에 인쇄소 일부 직원들이 일제 지폐원판을 빼돌려 우익계 인사들에게 판 것을 미군정 경찰이 체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위폐원판 사건을 조선공산당에 뒤집어씌우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받고 입수한 증거도 조작했다. 결국 당 재정부장인 이관술이 위폐를 지시했다는 내용으로 조작사건의 밑그림을 그린 뒤 대규모 체포가 이뤄졌다.

배문석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해방정국에서 좌익과 우익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면충돌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조작해 벌어진 ‘신탁통치’ 찬반 격돌보다 빠른 사건이다. 피로 점철된 좌·우익 대립이 이때부터 시작됐다. 지금이야 조작된 사건으로 억울한 판결이라는 것이 학위논문과 여러 연구로 제시되고 있지만, 당시는 결국 미군정 계획대로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관술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골령골로 끌려가 총살당한다. 이것은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은 불법적인 처형이었고 결국 누명도 벗지 못한 채 비운의 운명을 마감했다. 이관술의 외손녀인 손옥희씨는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던 외할아버지에게 1950년 7월3일 아무런 판결 없이 사형이 집행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2012년에 냈고 이 재판은 2015년 대법원까지 가서 최종 승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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