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올해 4월과 5월, 금속노조와 공공운수노조·민주일반연맹 소속 하청노조들이 원청사들에게 교섭요청 공문을 보냈다. 원청사들은 자신들은 단체교섭할 지위에 있지 않다거나, 혹은 하청업체들과 교섭하라는 무성의한 답변을 보냈다.

헌법에서 노동 3권을 인정하는 이유는 노조로 뭉쳐 교섭하고 투쟁할 때만 노동자들이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교섭이 의미가 있으려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결정할 권한을 가진 자들이 교섭에 나와야 한다. 하청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원청사가 결정한다. 원청사가 교섭책임을 회피하면 하청노동자의 노동권은 사실상 무력해진다.

한국지엠은 불법파견으로 노동자를 사용했다는 법원 판결을 받았다. 형식적인 고용계약과 상관없이 하청노동자들은 한국지엠 자동차를 조립했고, 한국지엠은 이 노동자들에게 업무지시를 했다. 그래서 법원은 “한국지엠이 하청노동자의 실질적인 사용자이므로 직접고용하라”고 주문했다. 한국지엠만이 아니라 현대·기아차, 포스코, 현대제철, 에이지씨화인테크노한국 모두가 불법파견이라는 법원 판결을 받았다. 이들 원청사가 하청노동자들의 실질적인 사용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하청노조의 교섭요청에 응답하지 않거나, 혹은 교섭의무가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지난 21일 현대중공업에서 또 한 명의 하청노동자가 사망했다. 올해 들어 다섯 번째 죽음이다. 이 노동자는 80센티미터의 좁은 배관 안에서 용접을 하다가, 용접할 때 나오는 아르곤가스를 마셔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노동자의 안전은 누가 책임져야 하나. 태안 화력발전소 김용균씨 죽음 이후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됐고, 원청의 지배관리가 가능한 장소는 원청이 안전보건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은 더 이상 죽지 않기 위해서 원청에 안전조치를 요구할 권리가 있고 원청은 그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사측의 답변은 “교섭할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마사회 시설을 관리하는 노동자들은 용역업체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마사회를 위해 청소도 하고 시설관리도 한다. 노동자들은 ‘한국마사회시설관리㈜’라는 마사회의 자회사에 소속돼 있다. 그렇지만 이 자회사의 지분은 모두 마사회가 갖고 있다. 마사회는 이 자회사와 도급계약을 맺으면서 도급금액을 결정하고 고용인원과 업무를 결정한다. 노동자들이 인력을 충원하라고 요구하려면 누구와 교섭해야 하나.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리고 싶으면 누구에게 요구해야 하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온전히 결정할 권한은 자회사가 아니라 마사회에 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교섭요청을 했으나 마사회는 “단체교섭의 당사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는 답변을 보내왔다

생활폐기물을 수집하거나 운반하는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생활폐기물이 제때 치워지지 않는다면 시민들은 민간위탁업체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에 항의할 것이다. 이것이 지자체 고유업무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지자체가 수행해야 하는 공적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인건비의 법적 기준도 환경부 고시로 나온 원가산정 방법에 따르도록 정해져 있다. 위탁업체가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생활폐기물이 제대로 처리되고 비리가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노동자들에게 권리가 있어야 한다. 노조가 지자체와 협상할 수 있어야 노동조건 개선도 가능하고, 생활폐기물 수집·운반 업무도 공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위탁업체 노동자의 교섭요구에 응하지 않는 지자체는 공적 책임을 포기한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 결사의 자유위원회는 한국 정부에 “하청구조가 결사의 자유의 적용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 않게 하라”고 권고한 바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19년 “원청에 단체교섭 의무를 부여하라”고 정부에 권고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원청이 ‘공동사용자 책임’을 지도록 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이제 이 권고와 약속을 지킬 때다.

원청사의 무책임한 교섭 회피 때문에 하청 노조들은 20일 중앙노동위원회에 공동으로 쟁의조정을 신청했다. 중노위가 국제사회와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고, 현실을 반영하는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더불어 21대 국회가 원청의 사용자책임을 명확하게 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조 개정에 책임 있게 나설 것을 촉구한다. 원청사들이 권한만 갖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정부가 묵인해 왔기 때문이다. 노동권을 무력하게 만든 책임에서 정부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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