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미 영화평론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TV에는 특별한 프로그램들이 편성됐다. MBC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을 방영하는가 하면, SBS에서는 <SBS 스페셜-그녀의 이름은>을 방송했다. 세상에나. 지상파 방송에서 ‘총을 든 시민군’과 ‘시위대의 중심에 있었던 여성들’을 보여줬다니. 굉장한 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첫째 영화 <택시운전사>류의 텍스트가 소심하게 견지하던 외부 관찰자의 시선을 벗어나 당사자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기 때문이고, 둘째 당시 광주시민들을 ‘무고한 희생자’로 보는 수세적인 담론에서 벗어나 ‘용감한 저항자’로 보는 주체적 담론을 펴는 것이며, 셋째 그동안 남성·지식인 중심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배제돼 왔던 넝마주이·여성 같은 하위주체들을 제대로 조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선무방송 했던 그녀는 어디에

프로그램은 처절했던 오월 광주의 참상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며,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에게 “총을 버리고 자수하라”는 계엄군의 최후통첩이 내려진 순간으로 시청자들을 데려간다. 팽팽한 긴장이 감돌던 그 새벽, 도청을 에워싼 공기를 가르는 쩌렁한 목소리가 있었다. “광주시민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 형제자매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시민군은 물론 계엄군의 뇌리에도 깊이 박힌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 그녀는 누구이고, 이후 그녀는 어떻게 됐나. 프로그램은 그 역사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시작한다.

그녀의 행방은 아는 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마 죽었을 거라고 했다.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등록돼 배상을 받은 이도 많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 경력을 훈장 삼아 정치에 입문한 이도 드물지 않은 세상에, 그토록 선연한 목소리를 남긴 주인공이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니. 그건 아마도 죽었기 때문일 거라 믿는 분위기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 새벽에 검거된 뒤 재판을 받고 풀려났으며, 이후 다른 도시에서 이름을 바꾼 채 살고 있다. 그녀는 자신이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를 비밀에 부친 채 살아 왔다. 왜 그랬을까.
 

시위대를 이끌던 여성들

프로그램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오월 광주에서 싸웠던 많은 여성을 만난다. 당시 75만명에 불과했던 광주시 인구 중 20만~30만명의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를 가능하게 한 사람이 전옥주였다.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연단에서 마이크를 잡고 시민궐기대회를 주도했다. 성난 시위대가 생포한 군인을 향해 분풀이를 하려 하자, 그는 시민들의 폭력을 자제시켰다. 그는 앞으로 시민군이 어떤 방식으로 싸울 것인지 연설하고, 시민협상대표단의 일원으로 계엄군과 협상했다. 전옥주의 탁월한 언변을 보고, 특수훈련을 받고 온 간첩이라는 음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이모님을 돕기 위해 잠시 광주에 내려와 있던 무용강사였을 뿐이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평범한 시민들도 비상한 상황에서 놀라운 용기와 재능을 발휘하는 일이 종종 있다. 열린 광장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한 이들은 엘리트주의에 갇혀서 평범한 사람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대중민주주의의 힘을 믿지 못한다.

전옥주가 체포된 뒤, 그의 뒤를 이은 연설가는 차명숙이었다. 그는 갓 스무 살 나이로 재봉학원에 다니던 여성이었다. 눈앞에서 총격이 벌어지자 시신을 수습해 손수레에 싣고 다니며 “민간인 희생자가 없다”는 계엄군 발표가 거짓임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자신을 향한 사격명령이 내려져 있음을 알았지만, 그는 가두방송을 멈추지 않았다.

직접 총을 들었던 여성도 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남민아는 당시 “아가씨”라서 안 된다고 밀어내던 시민군의 시위 차량에 올라가 총기 탈취에 가담했다. “우리들은 정의파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는 당시 시민군의 노래를 불러 주던 그는 자신 외에도 총을 든 여성들이 더 있었음을 증언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에 감명받아 도청에서 시민군에게 밥을 해서 나르다 계엄군에 체포된 열여섯 살 여학생도 있었다. 중무장한 탱크가 진입한 삼엄한 거리에서 시위대를 이끈 이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행진했던 여고생들이었다. 여성들은 헌혈을 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을 먹였다. 시위대에서 빼앗아 쌓아 둔 신발 무더기 상당수가 여성 신발이었고, 시위대를 찍은 기록사진 속 절대다수가 여성이다.

오월 광주의 주역이었으나, 가슴에 묻은 여성들

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동안 왜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주로 남자였을까. 주로 남성들만 항쟁에 참여하고, 여성들은 아들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로 그려지지 않았던가. 프로그램은 항쟁의 주역이었으나, 자신의 존재와 체험을 감추고 살아간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는 어떻게 주류 역사가 여성의 이름을 지워 왔는지를 똑똑하게 보여준다.

총기 탈취에 나섰다가 앞니가 모두 빠지는 중상을 당한 남민아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엄마가 “너는 결혼하기는 글렀다”고 말한 것이 깊은 상처가 됐다고 털어놓는다. 열린 광장에 뛰어들어 남성들과 함께 끝까지 항쟁한 여성들은 민주화운동의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여자가 극성맞다”느니, “문란한 여성”일 거라는 낙인에 시달렸다. 실제로 계엄군에 의한 성추행이나 성적 모욕을 겪는 일도 많았다. 이후 ‘조신하고 순결한 여성’을 요구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자신의 경험을 말할 수 없는 억압에 시달렸다.

1988년 역사적인 국회 광주청문회에서 주암마을 버스 총격 생존자로 증언한 홍금숙에게 유수호 당시 민정당 의원은 “결혼을 안 했으면 경상도 남자랑 하라”는 무례한 발언을 했다. 여성을 역사적 저항과 증언의 주체로 보지 않고, 연애와 결혼의 대상으로만 사유하려는 남성 중심적 시각을 잘 보여준다. 이런 시각들로 인해 마지막 새벽 선무방송의 주인공인 박영순도, 탁월한 선동가였던 전옥주와 차명숙도 모두 자신이 체험한 역사를 가슴에 묻은 채 살아간다. 남성 지식인 중심의 역사(히스토리)에 그녀들의 이야기(허스토리)는 기입되지 못한 채 지워지게 된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이 넝마주이·도시 빈민처럼 이름 없는 시민군으로 광장을 지켰음을 보여준 소중한 텍스트인 것과 같이, <SBS스페셜-그녀의 이름은>은 여성이 항쟁의 주역이었음에도 역사에서 지워지는 과정을 보여준 의미 있는 텍스트다. 광주전남 여성단체연합에서 펴낸 구술집 <광주, 여성>과 더불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할 귀중한 자료다.

영화평론가 (chingm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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