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사회적 대화를 해야 할 때가 있고, 그럴 필요가 없을 때가 있다.

지금은 후자에 속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어설픈 대화로 시간을 허비하기보다 신속한 입법과 집행으로 바로 나가야 한다. 전쟁에 비유되는 위기 앞에서 한가하게, 그리고 하염없이 ‘대타협’에 목맬 때가 아니다. 현 정세에서 사회적 대화에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는 문재인 정권과 여당이 코로나19 전염병 방역에서 그렇게 했듯이 경제위기 극복에서도 신속하고 과감하게 드라이브를 걸라는 것이다. 그 로드맵은 2017년 대통령선거 공약, 정권 초기에 마련된 100대 국정 과제, 그리고 2020년 총선 공약이 될 것이다. 그리고 최근 대통령의 ‘그린뉴딜’까지 로드맵은 이미 존재한다. 대통령과 여당이 자기 입으로 약속한 것에 대해 국민은 두 번이나 정치적 정당성을 확인해 줬다. 국회 의석이 모자란다는 등의 비겁한 핑계를 더 이상 대지 말고 약속한 걸 과감히 집행하라는 게 국민의 요구, 즉 사회적 합의다.

대통령과 여당에 연속 승리의 기회를 준 국민은 위기 상황에서 노동시간이 늘어나길 원하겠는가(코로나19 이전으로의 회귀), 아니면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일자리 공유로 실업을 극복하길 원하겠는가. 대통령과 여당은 선거 공약과 국정 과제로 무엇을 내세웠던가. 또한 국민은 현재의 비상시국에서 고용안정을 국가가 보장하길 원하겠는가, 아니면 고용을 시장의 냉혹한 논리에 맡겨 자본가의 해고할 자유를 확대하길 원하겠는가. 지난 선거에서 대통령과 여당은 무엇을 약속했던가. 국민은 집권세력이 거듭 약속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이 새 국회가 시작되는 6월에 바로 비준되길 원하겠는가, 아니면 사회적 대화라는 미명하에 공익의 탈을 쓴 법기술자들이 또다시 물타기에 나설 기회를 얻길 원하겠는가.

두 번의 선거를 통해 민의는 확인됐고, 로드맵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뤄졌다. 다시 말해 국민적 차원에서 코로나19 이후 경제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과 국가가 할 일, 그리고 이를 주도할 정치세력에 대한 결정이 이뤄진 것이다. 청와대는 전 국민 고용보험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밝혔는데, 문재인 효과로 압승을 거둔 여당이 반대할 리 만무하다. 이런 점에서 총고용 보장은 정치·사회적으로 ‘합의’가 끝났다. 사회적 대화의 최고 형태인 선거를 통해 국민의 선택을 받은 사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정이 어려워진 기업이 어떻게 고용보장을 가능하게 하느냐다. 그 ‘디테일’은 행정부가 정책과 집행으로, 그리고 입법부가 법률 제·개정으로 마련하면 된다. 경험도 없고 능력도 부족한 주체들이 참여하는 테이블에서 붙들고 앉아 시간만 끌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 전쟁’ 시국에서 국민이 뽑은 의원과 국민이 월급을 주는 관료가 해야 할 일을 세금을 내는 노사가 왜 대신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한국의 노사정은 ‘사회적 대타협’을 이뤄 낼 경험과 능력이 부족하다. 지금 사회적 대화를 통한 타협을 기대하는 것은 콩 심은 데서 팥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1998년 2월의 사회적 대타협은 그것이 가능했던 맥락(contexts)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라는 위기 상황만 강조하는데, 그것은 드러난 현상(a text)에 불과하다. 1996년 5월 출범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의 활동을 통해 축적된 정책과 노사정의 참여 경험이 없었다면 1998년 2월의 ‘사회적 대타협’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영삼 정부 때 노개위에는, 1995년 11월 출범했으나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던 민주노총도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신생 조직이었으나 당시 민주노총의 정책 역량은 한국노총에 못지 않았다. 사회적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컸다. 또한 주요 산업을 마비시키는 총파업을 성공시킬 만큼의 조직 역량과 내부 기율도 갖고 있었다.

지금의 실정은 어떤가. 2017년 12월 사회적 대화 참여를 공약하고 ‘조합원 직선제’로 당선된 민주노총 집행부는 내부 반발에 밀려 자신들이 설계에 참여한 법정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조차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선거에 참여한 조합원들이 승인한 공약조차 내부 역학과 정파 입김에 휘둘려 실천하지 못했다(직선제를 통해 확인된 조합원의 의지가 노동운동 관료들에 의해 거부된 것이고, 그런 직선제라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그 이유와 책임 소재가 어디에 있든지, 결과적으로 2년 넘는 세월을 허비해 버렸다. 시행착오를 통해 교훈을 얻고 실력을 배양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을 날려 버린 것이다.

코로나19 이전이 평시라면 코로나19 현재는 전시다. 평시에 훈련을 게을리한 군대가 전시에 잘 싸우길 기대하는 건 공부를 안 한 학생이 시험 결과가 좋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물론 ‘원 포인트’를 결단한 한국노총 집행부의 포용력과 ‘원 포인트’라도 해야 한다는 민주노총 집행부의 의지는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서리 내리는 늦가을에 모내기를 할 순 없는 법이다.

셋째, 문재인 대통령이 진짜로 한국형 ‘뉴딜’을 하고 싶다면 루스벨트의 ‘역사적’ 뉴딜에서 실천적 교훈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루스벨트의 뉴딜이 사회적 대화를 통한 합의를 통해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1933년 3월4일 취임한 루스벨트와 함께 노동부 장관 임기를 시작한 이가 프랜시스 퍼킨스(Frances Perkins)다. 대공황 파국에서 퍼킨스가 한 것은 대화의 거간꾼 역할이 아니었다.

그는 루스벨트 행정부가 추진할 복지·노동정책 리스트를 이미 마련해 두고 있었다. 노동시간단축, 사회복지 확대, 부자와 기업 증세, 실업부조, 최저임금제 도입, 노동조합 권리 강화,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금지, 사용자의 단체교섭 의무 부과를 포함한 ‘노동 뉴딜(Labor New Deal)’의 핵심은 루스벨트와 퍼킨스의 머리와 가슴속 실천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이해당사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마련된 게 아니었다. “미국 역사상 전례 없던” 정책들을 대화를 통해 합의하려 했다면 루스벨트 행정부 역시 전임 후버 행정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을 것이다.

엘리트 지배층 출신인 루스벨트는 “자기 계급의 배신자”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들으면서도 시대정신을 체현하고 있던 개혁가를 장관 자리에 앉히고 개혁을 밀어붙였다. 운이 좋게도 루스벨트가 취임하던 날 출범한 73대 미의회도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했다. 대통령과 여당이 주도한 뉴딜 법안에 수구적인 사법부가 위헌 결정을 내리며 저항했으나, 루스벨트와 퍼킨스는 굴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신념대로 밀어붙였다.

사회적 대화를 하는 정세가 있고, 안 하거나 못하는 정세가 있다. 겨울이 오는데 씨를 뿌릴 수는 없다. ‘원 포인트 사회적 대화’는 하루빨리 종결해야 한다. 논의가 구체적일수록 쓸데없는 말들이 많아지고 배가 산으로 가게 돼 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같은 상황이 우려되는 지금 정세에서 코로나19 극복 방안과 이후 한국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큰 원칙(framework)을 선언하는 선에서 하루빨리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다.

‘코로나19 전쟁’의 총사령관인 대통령의 지휘하에 법안은 여당이, 시행령·시행규칙 개정 그리고 집행은 행정부가 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알찬 정보의 제공과 충실한 협의(consultation)는 당연하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지금 정세에서는 사업장 수준에서, 가능하면 업종과 산업에서 이뤄지는 작은 타협들이 꾸준히 쌓여 결과적으로 ‘대타협’으로 발전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한 방은 없다. 양이 쌓여야 질로 전화되는 것이다.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을 빌미로 법기술자들을 동원해 법 개정안 작업을 하다 뒷걸음질한 경사노위의 교훈을 잊어선 안 된다. 그러한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과 훈련은 평시에 하는 것이다. 전시에는 전쟁을 해야 한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