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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부른 뉴딜보다 적절한 방역 경제가 필요한 때
▲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코로나19 사태 이후 갖가지 뉴딜론이 유행이다. 문재인 정부는 한국형 뉴딜을 실시하겠다고 선포했고, 진보진영에서는 그린뉴딜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진다. 뉴딜론이 유행인 이유는 코로나19 사태가 전쟁과 대공황이 있었던 20세기 초와 비교되기 때문인 것 같다. 뉴딜은 대공황부터 2차 세계대전 즈음까지 이어진 미국의 경제정책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대책으로 뉴딜을 제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경제 조건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대공황은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대대적으로 향상되는 가운데 경제제도가 그 혁신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반면 현 경제위기는 생산성 둔화와 10여년 전 발생한 세계 금융위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감염병이라는 돌발상황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비유하자면 1930년대는 건강한 상태로 감염병에 걸린 것이었고, 현재는 기저질환을 앓다가 감염병에 걸린 것이다. 둘의 처방이 같을 수 없다.

20세기 초 미국은 2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제도였다. 제도가 기술발전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상품이 나오던 시기, 금융시장은 한계기업과 선도기업을 구별하지 못했다. 금융기관들은 투자와 투기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금융감독제도와 화폐제도라 할 만한 것도 별로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29년 증시 폭락이 방아쇠가 돼 뱅크런이 터졌고, 은행이 부도나면서 경제 전체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루스벨트 정부는 대공황 정책으로 구제(relief)·개혁(reform)·회복(recovery)으로 구성된 뉴딜 정책을 시행했다. 구제는 실업자와 빈곤층을 돕는 것이다. 생존권 위기에 빠진 노동자와 농민이 1910년대 러시아 같은 계급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회복은 생산에 필요한 산업시설이 폐기되지 않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루스벨트 뉴딜의 포인트는 개혁이었다. 뉴딜의 핵심은 오늘날 많이 소개되는 정부 주도 대규모 투자는 아니었다. 정부가 새롭게 뭔가를 하는 것보다 19세기 말부터 이어지고 있던 민간의 혁신과 투자를 이어 가는 것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관건은 끊어진 흐름을 잇는 것이었다. 개혁이 바로 그 역할을 했다. 루스벨트는 방종을 일삼던 은행을 규제했고, 금본위제를 비롯한 통화제도 전반을 현대화했다. 그리고 이런 개혁 성과로 1930년대 말부터 다시 2차 산업혁명의 효과가 이어지며 경제가 빠르게 복구됐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코로나19 이전에도 세계 경제는 이미 오랜 생산성 둔화와 천문학적 부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중앙은행은 금융위기 때 풀린 돈을 회수하지 못했다. 기업들은 저금리를 이용해 부채로 사업을 확장했다. 사실 이런 이유로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경기침체가 예상되기도 했다. 20세기 초가 인류사의 도약시기였다면, 21세기 초는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된 후 가장 형편없는 성장을 기록하던 시기였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뉴딜을 오늘날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뉴딜은 끊어진 성장의 흐름을 잇는 것이었다. 현재는 이어야 할 이전의 성장이 없다. 뉴딜이 작동할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새롭게 거래해야 할 대상이 없는데 ‘뉴딜’이란 말만 나오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태다.

내가 뉴딜에 대해 부정적인 두 번째 이유는 현재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뉴딜 정책은 그나마의 개혁적 내용도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뉴딜 정책은 정부 주도 몇 가지 디지털 투자를 묶어 놓았다. 그런데 21세기 한국 경제는 60~80년대 같은 정부 주도 추격성장 경제가 아니다. 정부 주도로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인다. 더구나 1930년대 뉴딜의 핵심이었던 제도 개혁은 문재인 정부 뉴딜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한편 진보진영의 그린뉴딜 제안은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그린뉴딜은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투자로 일자리를 만들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코로나19 구제 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부가 상당한 재정적자를 감당해야 하는 모험적 투자를 감행하자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또한 친환경 에너지는 상당 기간 에너지 비용을 높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업 이윤으로 생산이 조직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더군다나 대불황에 버금가는 위기 속에서 이런 비용 증가를 감당하는 투자가 어떻게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1930년대 뉴딜은 비용을 절감하는 생산성 혁신 속에서 이뤄졌다. 자본주의를 잘 돌아가게 하자는 뉴딜을 그린과 결합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코로나19 경제에는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될 때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이어 가며 그 경제적 피해를 사회 구성원이 최대한 공평하게 감당하는 것이 중요하다. 뉴딜이나 경기부양은 언감생심이다. 오히려 방역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코로나19 사태의 경제는 두 가지가 핵심이다.

첫째, 거리 두기 비용을 정부가 감당하는 것이다. 거리 두기 비용이란 시민 생존을 두루 지원하고, 기업이 파산까지 가지 않도록 구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정부가 소득을 지원하고, 보험을 확대하고, 대출을 이어 가는 것이다.

둘째, 치료제와 백신 개발 때까지 지원을 이어 가도록 재정 여력을 충분하게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자가 이어져 부채가 누적될수록 구제 능력은 당연히 하락한다. 한국은 기축통화국처럼 화폐 안정성이나 정부 지불능력에 대한 신뢰도가 높지 않다. 더구나 무역흑자가 이전처럼 이어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라 더더욱 화폐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재정적자나 국가부채 상한선이 분명하다. 전 국민 재난지원금 같은 무조건 쏟아붓는 정책이 아니라 정확하게 필요한 곳에 충분히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참고로 구제 기간이 길어지면 당연히 재정적자가 커질 수밖에 없는데, 부채를 쌓는 것보다 증세가 바람직하다. 누진적 증세로 소득이 많은 시민에게 더 많은 방역 비용을 걷어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한지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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