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탁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경기도 재난기본소득은 사용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화폐다. 사용 승인이 난 뒤 3개월 안에 사용해야 한다. 즉 장기간 저축할 수 없는 돈이다. 그래서 1차 사용자에게는 상품교환의 지불수단으로만 쓰인다. 돈을 쌓아 놓을 수 있다는 의미인 축장기능은 2차 사용자 이후에게만 가능하다. 소득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1차 사용자에게는 ‘부’로서의 의미가 없다. 축적되지 않고 오로지 화폐의 본래적 기능만 충실히 하는 돈이다. 2차 이후 사용자들도 이 돈을 축적하지 않고 교환기능으로 사용한다면 수요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재난기본소득은 그렇게 기획된 화폐는 아니다.

2차 이후 사용자들도 이 화폐를 축장하지 않고 교환수단으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와는 다른 화폐로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재난기본소득은 1차 사용자에게 3개월이라는 사용기간 제한만 할 뿐 중앙은행에서 발행하는 화폐와 차이가 없다. 2차 사용자에게는 아무런 사용기간 제한이 없기 때문에, 기존 화폐와 차별성이 전혀 없다. 만약 2차 사용자에게도 사용기간 제한을 두려고 한다면, 기존 화폐와는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만약 장기간 축장이 불가능하고, 또 오래 가지고 있을수록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는 화폐를 만든다면 어떨까. 빠르게 교환돼야 하기 때문에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에 그런 돈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존재했다. 이른바 썩는 화폐다. 1930년 대공황기에 독일 탄광촌인 슈바넨키르헨에서 스탬프 화폐가 시도됐다. 은행들이 위기에 빠지면서 화폐가 부족하게 됐는데, 폐쇄된 탄광촌을 재가동하기 위해 탄광 소유주가 ‘베라’라는 지역화폐를 발행해 임금을 지불했다. 이 화폐는 매달 액면가의 2%에 해당하는 스탬프를 별도로 구매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도록 돼 있었다. 그래서 돈을 쓰지 않으면 매달 2%에 해당하는 스탬프를 붙여야 하므로 빠르게 유통됐다.

이 스탬프 화폐는 1932년 오스트리아 베르글시에서도 시도됐다. 당시 베르글시장은 대공황의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공공사업을 벌였는데, 공공사업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노동증명서를 발행했다. 그런데 이 노동증명서는 매월 1%의 스탬프를 붙여야 그 가치가 유지되는 스탬프 화폐였다.

이러한 썩는 화폐는 독일의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에 의해 주창됐다. 게젤은 화폐의 중심기능을 교환의 도구로 만들기 위해 노화하는 화폐(aging money)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화폐는 축장되지 않고 빠르게 사용될 것이다. 이러한 게젤의 자유화폐론은 스탬프 화폐 외에도 다양한 형태로 시도됐다. 그런데 지역에서 경제적으로 유용함이 증명됐던 이 화폐들은 중앙은행에 의한 국가 통화시스템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법으로 금지되고 말았다.

신속함을 필요로 했던 재난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느냐, 아니면 70%의 국민에게 지급하느냐를 두고 아까운 시간을 보냈다. 정부와 여당이 고소득자들의 자발적 기부를 권유하는 것으로 하고 전 국민에게 지급하기로 합의했지만, 또 여야 간 타협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한국의 방역활동이 빛을 보고 있는 것은 신속한 대처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난에 대한 정부의 경제적·사회적 대처에서는 날랜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썩는 화폐의 아이디어를 다시 떠올리는 것은 지금 당장의 재난소득을 그렇게 하자는 취지는 아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세상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는 지금, 경제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오래됐지만 새로운 지혜들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자 발생에 기초하는 인플레이션으로 존재를 유지하는 금융기관들은 게젤의 자유화폐를 아마 극력 반대할 것이다. 금융기관은 화폐 자체가 상품이 돼야만 존재하고, 상품 교환의 흐름에 단절이 있어야 대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중앙정부 역시 중앙은행이 재정운용의 동력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리 없다. 그러나 지역 차원에서는 자유화폐 시도가 충분히 가능하다. 또 앞서 나가는 지방자치단체장이라면 이런 시도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노회찬재단 사무총장 (htkim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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