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김삼룡 선생(1910~1950년)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김삼룡은 전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그는 바로 상경해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가했다. 45년 8월17일 저녁 계동 홍증식의 집에서 박헌영·김삼룡·이주상·이관술·이현상·정태식·김형선 등 17~18명이 모였다. 여기에서 공산당 재건을 결의하고 역할을 분담했다. 8월20일 낙원동 안중빌딩 2층에서 재건파 조선공산당이 결성됐다. 이미 장안파 조선공산당이 있었으나 45년 9월8일 60여명이 참가한 4차 계동열성자대회에서 투표를 통해 재건파가 승리했다. 그러나 전국대표자회의를 생략하고 중앙집행위원 선출도 박헌영 개인에게 일임하고 콤그룹 출신 일색으로 다른 파벌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아 파쟁의 불씨를 안고 출발했다. 김삼룡은 이현상·김형선과 함께 조직국원으로 선출됐다.

중앙당 조직국의 부책임자 겸 서울시당 위원장을 맡은 김삼룡은 서울을 5개 지구(영등포구당·용인구당·중앙구당·동대문구당·철도구당)로 나눠 각 지역에 책임자를 선정했다. 자신은 총책임자가 돼 철저한 보안 속에 당 조직과 노동조합 등 대중단체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종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해방 이후 영등포지구에는 상해파 ML파 등 여러 그룹이 활동을 재개해 영등포구 회의를 열고 지구위원회를 결성했는데, 김삼룡은 이를 무시하고 콤그룹 출신 중심으로 별도의 지구위원회를 조직해 당과 노동조합은 갈라지게 됐다.

해방 이후 합법 공간에서도 김삼룡은 자신을 공개하지 않았다.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전평 결성대회 이후 45년 11월20일부터 3일간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공산당을 대표해 축사를 했을 뿐이다. 김삼룡은 이승만의 친일파 옹호를 반박했으나 “38도선 이남의 미군도 역시 조선해방을 위해 협조하는 군대이므로 이러한 군정이 결코 독립 방해자가 아니고 협력자로서 우리는 그들과 협력해 독립을 위해 싸워 나가야 한다”며 미군정을 ‘협력자’로 인식했다. 박헌영의 <8월테제>에서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국가’로 규정하고 미국과 협력해 자주·통일·독립을 실현할 수 있다는 오인의 연장선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미 군정의 본질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로당의 최후 최고 지도자의 고뇌

미군정이 46년 5월 ‘정판사 사건’을 조작해 핵심 간부들 체포령을 내리고 이에 맞서 조선공산당은 대중적 기반 확대를 위해 인민당·신민당과의 3당 합당을 추진했다. 46년 7월29일 북쪽에서는 이미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중앙위 확대연석회의를 통해 북조선노동당으로 합당했다. 남쪽에서는 46년 8월 초부터 논의가 진행됐는데, 3당 모두 내부분열에 직면했다. 조선공산당은 추진파와 대회파, 인민당은 48인파와 31인파, 신민당은 중앙 간부파와 반간부파 등으로. 3당 합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11월 초 평양에서 조선공산당의 이승엽·김삼룡, 조선인민당의 이만규,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 등 10여명이 북로당 정치위원들과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삼룡은 “조선공산당 내 편협한 종파주의가 합당을 원만하게 이끌지 못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됐다”고 반성했다. 그러나 문제제기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46년 11월23일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됐으나 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사회노동당으로, 다시 47년 5월24일 근로인민당으로 모여 좌익정치세력의 분열은 계속됐다.

47년 9월23일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미국 대표는 “조선문제를 유엔에 상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에 맞서 소련 대표도 “미소 양군을 48년 초까지 완전 철수시키고 조선정부의 설립문제를 모두 조선민족에 맡기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미국의 거수기에 불과한 유엔을 동원해 38선 이남에 단독정부를 세우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분단 음모에 맞서 반미구국투쟁이 시작됐다. 48년 2·7 구국투쟁을 시작으로 4·3항쟁, 여순항쟁으로 이어졌다. 오직 통일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바라는 항쟁에서 수많은 민중이 학살됐다.

48년 3월 중순 김삼룡은 38선을 넘어 남로당과 북로당의 합동정치위원회에 참석했다. 남로당에서는 박헌영·이승엽·김삼룡 등이 참여했다. 김삼룡은 박헌영이 지시한 3·1 거점투쟁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3·1 거점투쟁은 완전히 실패했다. 당 역량이 남아 있던 지역에서 거점투쟁을 진행함으로써 남아 있던 조직역량이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더구나 현시점에서 거점투쟁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가?” 그러나 비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동지의 변절로 체포와 묵비권 행사

48년 7월 박헌영의 대리자, 이승엽이 월북하자 김삼룡은 남로당 최고책임자 역할을 이어받았다. 김삼룡을 중심으로 이주하·정태식이 3인 지도부를 형성했다. 그러나 미 군정의 폭압과 당 중앙의 무리한 투쟁으로 대중이 이탈하고 조직이 무너져 갔다. 당시 치안국에서 김삼룡 체포 공작을 치밀하게 짜고 있었고 그 막후에 미국대사관 정치고문 노블과 미 극동사령부 항공정보관 니콜스가 있었다. 이들은 50년 1월 초순부터 변절한 안영달(남로당 서울시위원회 특수부위원으로 박헌영과 서울시위원회 간 연락담당)을 이용해 김삼룡 체포에 나섰다. 종로경찰서에 구금돼 있던 김삼룡의 연락책임자, 조용복을 회유 석방시켜 언제든지 아지트를 급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블과 니콜스는 안영달을 김삼룡에게 연결시켜 남로당 활동 전반과 당 기밀을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던 중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가 김삼룡 비서 김형욱을 체포, 김삼룡이 거처가 드러나자 미국 배후 치안국의 비밀공작을 몰랐던 경찰국이 50년 3월15일 0시 김삼룡의 은신처를 급습했다.

그러나 김삼룡이 발에 큰 부상을 입고도 담을 넘어 빠져나가 안영달을 배치한 북아현동의 당 아지트에 갔다. 안영달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이다. 치안국 수사대가 안영달이 알려 준 대로 북아현동으로 달려가 김삼룡을 체포했다. 이 남로당 최후 최고 지도자는 자신의 옛 동지와 비서의 손에 의해 적에게 넘겨지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김삼룡 체포의 일등공신인 치안국 사찰과 백형복은 50년 4월 안영달·조용복을 의거 월북 형식으로 북으로 침투했다. 이들은 서울지도부 특수부 책임자인 김형욱이 변절해 김삼룡이 체포됐다고 거짓 보고했다. 이승엽이 그렇게 하라고 시켰고 박헌영도 묵인했다고 한다. 이는 북에서 ‘박헌영-이승엽사건’으로 백형복·조용복이 체포되면서 알려졌다. 안영달이 밀고자라는 사실은 50년 6월28일 인공치하의 서울에서 폭로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이순금 등 남로당원들의 입에서 안영달이 김삼룡을 잡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당시 이승엽은 안영달을 남진하던 임종환 부대의 정치위원으로 배치시켜 전선에 보낸 다음 살해하고 말았다.

김삼룡은 체포된 뒤 철저하게 묵비권을 행사했다. 수사팀은 마지막 방법으로 효제동에 있는 세 살 아들과 부인을 시켜 전향해 함께 살도록 권유하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김삼룡은 인간적 고뇌에 빠져들었으나 굴복하지는 않았다. 50년 5월17일 김삼룡·이주하·정태식에 대한 특별재판에서 김삼룡은 이렇게 최후 진술했다.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소. 나를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처형해 주시오.” 이 한마디를 남기고 입을 다물었다. 김삼룡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그로부터 40일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정권은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정치범들을 곧바로 처형했다. 김삼룡은 전쟁발발 다음날인 6월26일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 만 40세 때 일이다.

북으로 가 장수한 부인 이옥숙

통일뉴스 2016년 9월7일 기사 “北 김삼룡 부인 리옥숙 가족 사진 공개”(북한 웹사이트 ‘조선의오늘’ 인용 보도)에 따르면 김삼룡의 부인 이옥숙이 100세 생일을 맞아 자손들과 함께 김삼룡 비석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나라의 해방과 통일을 위하여 싸우다 희생된 김삼룡 열사의 부인인 리옥숙 할머니가 지난 5월17일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일제통치의 암담하던 시기 충청남도 빈농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난 그는 일찍이 어머니를 잃고 14살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태창직물공장에서 모직 고역살이를 하는 과정에서 혁명적으로 각성되어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그 나날 반일지하투쟁을 하던 김삼룡 선생과 알게 되고 그와 한 가정을 이룬 그는 해방 후에도 남편과 함께 민족분열영구책동을 반대하여 적극 투쟁하였다”라고 소개돼 있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 주석이 직접 차를 보내 김삼룡 부인 이옥숙은 세 딸 경애·영애·해산과 함께 월북했다고 전해진다. 김삼룡이 체포되자 김 주석은 그를 구원하기 위한 내무성 성명을 발표, 남측이 체포한 이주하와 함께 북측이 감금 중인 조만식과 교환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제의하기도 했다. 북한은 1990년 김삼룡에게 조국통일상·공화국영웅칭호(1993년) 등을 수여하고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가묘와 비석을 세웠다. 93년 김영삼 정권 시기 북송된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의 수기에도 1937년 여름과 1938년 항일빨치산 김일성부대 김정숙이 풍산에 나와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을 해설하고 자신과 친구 주병포를 서울로 보내 김삼룡을 보좌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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