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김삼룡 선생(1910~1950년)

‘탕 탕 탕’

6·25 전쟁이 터진 다음 날, 1950년 6월26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서둘러 남산 숲속으로 끌려가 총살당한 걸출한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가 있다. 그해 3월27일 체포돼 5월17일 사형선고를 받은 후 40일째, 점점 가까이 들려오는 북쪽의 포성에 귀 기울이며 심장의 고동을 멈췄다. 최후의 순간에는 만세삼창을 했을 것이다. 뭐라고 외쳤는지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의 한결같은 삶으로 볼 때 “통일독립 만세”라고 소리치지 않았을까. 바로 ‘전설적 조직 귀재’ ‘비운의 혁명가’로 불리며 죽을 때까지 굴하지 않은 노동계급 출신의 남로당 최후 최고 지도자 김삼룡 이야기다.

소작인의 똑똑하고 뚝심 있는 아들

김삼룡(1910년 2월9일~1950년 6월26일)은 한일병탄의 경술국치 해인 1910년 충북 충주군 엄정면 용산리에서 소작인의 6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용서는 김삼룡이 태어난 지 몇 년 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편모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 전운계는 여섯 자식을 키우기 위해 면소재지 시장터에 주막을 차렸고 큰형 쌍룡이 남의 땅을 빌려 충주의 명물인 황색연초를 경작하며 집안을 뒷바라지했다. 그 덕분에 작은형 복룡부터 용산리 공립보통학교(엄정초등학교의 전신)에 다녔고 삼룡도 13세 때 그 학교에 들어갔는데, 1등을 도맡을 정도로 재주가 좋았다.

초등학교 동기생의 말이다. “삼룡이 그놈 키는 작고 땅땅했지만 공부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했지. 두뇌가 아주 명석하고 한 곳에 집착력이 강했고. 또한 우직할 정도로 뚝심이 좋았지.” 보통학교 5년 후배는 “어느날 사무소 앞인데, 담뱃잎이 든 봉다리를 안고 달려가던 김삼룡을 일본 사람들이 다리 걸어 자빠트려 넘어졌고, 담뱃잎은 산산이 흩어졌어. 그러자 왜놈들이 통쾌하다며 웃어싸면서 놀려 댔지. 그런디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흩어진 담뱃잎을 주어담더니 씩 한 번 웃더니만 태연히 걸어가는 걸 봤구먼. 여느 사람이 아니라구 생각했지”라고 전한다. 똑똑하고 성실하며 냉정하고 침착한 그의 일면이 잘 드러나는 일화다.

김삼룡은 1922년 보통학교 1학년 때 담임이었던 민족주의자 이형제 선생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처음으로 민족의식·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같은 반 윤병익(한국전쟁 때 엄정면 인민위원회 활동) 등과 함께 청년운동을 시작했다. 1928년 2월 열아홉 살 나이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두 달 뒤 이형제 선생과 서울로 올라와 진보적 지식인 이준열이 설립한 ‘칼토페’(고학당)에 들어갔다. 칼토페는 동대문 밖 도살장 시멘트 바닥에서 시작해 학생들이 물건도 팔고 공연도 해서 모은 돈으로 건물을 세운 자활단체였는데, 사회주의자들을 많이 배출한 무산계급의 학교로 자부했다. 김삼룡은 여기에서 많은 사회주의 서적을 탐독하고 배제고 김병선과 독서회를 조직·운영하다가 1930년 11월 치안유지법으로 일경에 체포·구속돼 1년2개월의 첫 번째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고학당 독서회로 구속돼 이재유를 만나다

1931년 여름 서대문형무소 채석장에 나간 김삼룡이 당대의 유명한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 이재유를 만나면서 또 한 번의 인생전환기를 맞는다. 이재유는 함남 삼수 출신으로 서울 보성고보, 개성 송도고보를 거쳐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전문부 사회과에 입학한 뒤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동경조선노동조합·재동경조선청년총동맹·신간회 동경지회 등의 위원을 지냈고 1927년 후반기 이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지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8월 4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압송돼 징역 3년6월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김삼룡은 이재유로부터 조선독립과 새 사회 건설의 길, 운동가의 삶과 실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1932년 2월 김삼룡은 만기 출소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과의 거리가 50여미터인 일경 엄정면지서의 감시 속에서도 청년들을 접촉하고 모임을 갖는 등 활동을 재개했다. 이런 교양학습을 통해 의식화된 청년들이 훗날 한국전쟁 직후 보도연맹으로 800명이나 학살당한다. 김삼룡은 귀향 4개월 뒤 인천으로 옮겨 부두 하역인부로 취업해 본격적인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재유도 1932년 12월21일 출옥해 폐결핵을 요양하면서 조직재건을 모색하고 있었다. 1933년 2월 김삼룡이 이재유를 방문해 노동운동의 방향을 협의했다. 노동현장에 직접 들어가 노동자 동지들을 포섭하고 단단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건설해 이를 기반으로 당을 재건한다는 내용이다.

김삼룡은 인천, 이재유는 경성, 이관술은 영등포와 학생조직을 맡아 트로이카 방식으로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트로이카 조직 방식을 택한 이유는 세 명 이상이 한 조가 돼 공동으로 결정하고 책임져 성원들의 자주성을 높이고, 다른 계통의 사회주의 활동가까지 보다 많은 동지를 얻으며, 경찰에 검거될 경우 조직 전체가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삼룡이 인천에서 찾아낸 첫 동지는 1929년 원산총파업에 적극 가담했다가 체포를 피해 인천으로 와서 하역노동자가 된 이백만이었고 인천 토박이 이석면까지 규합해 조직사업을 전개했다.

경성 트로이카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국내 최대 사회주의운동 조직으로 발전했다. 특히 김삼룡은 하룻밤 사이에 트로이카 1개 이상을 조직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1933년 11월 중순 동거인 이상철과 이백만·이석면 등과 인천적색운수노조 건설 준비를 논의했다. 각자 노동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자 동지를 포섭하고 트로이카 조직을 만들면 인천항 하역노동자 생활실태를 조사해 착취 현실과 투쟁 목표를 인식시키고 <공산주의 ABC> 등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회를 조직했다. 특히 자체 기관지를 통해 “노동자 착취기관 영신조·창신조·인신조를 타도하자” “기아와 실업을 유발하는 자본가와 그와 결탁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트로이카 성원의 구호와 글을 통해 하역노동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었다.

하룻밤에 트로이카 1개 이상 조직화

그러나 1934년 1월 인천 적색운수노조 관련 정보가 노출되고 이백만이 먼저 가택수색을 당하고 체포됐으며 그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삼룡의 존재가 드러났다. 일경에 의해 그의 거주지가 급습당했으나 다행히 외출 중이라 체포되지 않았다. 소식을 접한 김삼룡은 즉시 서울 변두리에 은신했다가 안병춘과 함께 이재유의 은신처에 찾아갔다가 잠복 중인 사복형사들에 체포되고 만다. 하지만 김삼룡은 조직준비 과정에 체포됐다고 일관되게 진술해 인천 적색운수노동조합 실체는 노출되지 않았다.

이재유·김삼룡 등의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경성그룹’은 일제의 기록에 드러난 숫자만 해도 500여명을 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1934년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 삼택과 이현상·김삼룡 등 수많은 조직원이 체포되고 그중 34명이 기소됐다. 체포를 면한 이재유도 재건을 모색하다가 1936년 12월25일 검거돼 조직이 와해됐다. 이 조직 사건으로 몇 해 동안 국내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이 잠잠했고 김삼룡도 1937년 출옥한 후 다시 고향에 내려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때 검거를 피한 이관술이 다시 조직재건에 나서 1939년 1월 이복 누이동생 이순금과 함께 김삼룡을 찾아와 조직책임을 맡겼다. 김삼룡이 기본계급 출신이고 보안의식이 철저하며 조직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김삼룡을 만나고 상경한 이관술은 이현상·권오직과 상의해 출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경성콤그룹을 조직했다. 박헌영을 책임자로 추대하고 이관술·김삼룡·이현상·정태식·이순금 등 ML계, 이재유의 ‘조선공산당재건운동 경성그룹’ 멤버와 이복기·이인동·서중석 등 상해파, 박헌영·권오직 등 화요파로 불리던 그룹 등 여러 파벌이 결합한 조직이었다. 김삼룡은 이관술의 제의를 받아들여 곧바로 상경했는데 우선 각 공장의 세포조직을 복구하기 위해 대창직물·경성전지·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에 파고들어 갔다. 이때부터 줄곧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자로 활동했다. ‘노동자프린트’를 교재로 노동자들의 민족해방 계급해방 의식을 고취시키고 각 부분의 핵심 활동가를 포섭해 집중적인 교양을 실시한 후 공장에 파견했다.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는 수기를 통해 1937~1939년 김삼룡 지도의 서울지역 노동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됐음을 아래와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합동노조 산하에는 서울시내 근 20개 중요 공장들을 망라한 금속노조분회·섬유노조분회·출판노조분회 등이 조직돼 활동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서는 1939년 10월 태창직물주식회사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이었다. 주병포는 김삼룡 동지와 함께 수리공으로 변장하기도 하며 태창직물주식회사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 세우며 핵심들을 키워 나갔다. 마침내 1천200명의 노동자들은 임금인상·노동시간단축·숙식조건 개선 등 요구를 내걸고 5일간 파업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이 파업투쟁을 나는 직접 목격했기에 여기에 언급하는 것이다. 파업투쟁이 승리한 후에는 투쟁에서 검열된 여성노동자들로 공장노조분회를 조직했다. 그중에는 김 동지의 부인이 된 여성도 있었다. 그들의 결합은 태창직물주식회사의 파업투쟁을 조직하고 승리에로 이끄는 속에서 맺어진 굳건한 사랑이었다.”

경성콤그룹의 조직부, 노동부 책임자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그러나 이 경성콤그룹도 불과 2년을 못 가고 무너졌다. 1939년 말부터 하나둘 체포되더니 1940년 일본 유학생부의 김덕연이 체포되면서 조직선이 드러나 그해 12월 김삼룡이 또다시 체포·구속되고 만다. 조직원 대부분이 검거됐고 박헌영은 광주시내 벽돌공장 인부로 숨었다. 이때 검거된 사람들 중 김삼룡 등 몇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불기소·기소유예·보석·집행유예로 해방 전에 출옥했다. 일시에 급습을 받아 조직원들이 체포돼 감옥 안에서도 명단 누설 밀고자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으나 해방 이후에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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