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노동권 연구활동가

“지금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심각하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던 것이 벌써 몇 주 전이다. 코로나19 사태는 가뜩이나 침체돼 가던 세계와 한국 경제에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을 가했고, 국제노동기구(ILO) 등 국제기구들도 위기의 도래를 연일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코로나19 사태가 1997년 외환위기와 유사하게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크게 가지고 있다.

97년 경제위기는 우리 사회를 ‘헬조선’으로 바꾸는 분수령이 됐지만 이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재벌 발 위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것이 위기의 시작이었다면, 이에 대응해 김대중 정부가 주도했던 4대 부문 구조조정 정책은 외환위기를 국민경제의 위기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했다. ‘금융 개혁’의 이름으로 금융·외환투기를 규제할 수 있는 장치들을 해체해 버렸고, ‘공공부문 개혁’의 이름으로 공적 서비스는 사유화하고, 비정규직·외주화 활용을 확산했다. ‘노동시장 개혁’의 이름으로 사용자에게는 해고의 자유를, 노동자에게는 불안정노동과 빈곤화를 안겨 줬다. 요컨대 ‘국가부도 사태’라는 대중의 공포를 활용해 거의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고 경제와 사회체제를 자본, 구체적으로는 재벌에 유리하도록 재편할 수 있었다.

지난 23일 한국경총은 ‘경제활력 제고와 고용·노동시장 선진화를 위한 경영계 건의’라는 제목으로 경제·노동 관련 8대 분야 40개 입법 개선 과제를 발표했다. 법인세·상속세 인하, 국민연금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자본시장법) 개악, 경영상 해고 요건을 비롯한 해고 전반의 요건·절차 완화, 탄력근로시간제 확대, 파견업무 제한 철폐, 기간제 사용기간 제한 철폐, 직무·성과 중심 임금체계 개편, 최저임금법 개악,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쟁의행위시 대체근로 전면허용 등 그동안 재계가 요구해 온 것들의 집약판이라 할 만하다.

이런 재계 움직임을 그저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 작태라고 논평만 하기에는 상황이 심각하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단계로 격상된 2월 말 이후 정부가 내놓은 종합대책은 금리인하와 역대급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을 통해 돈을 풀고 기업주에게 대출 연장, 고용유지지원금을 비롯한 각종 보조금 지급, 특별연장근로 인가 확대 등 주로 기업주에 대한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조적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촉발된 생계위기를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겪고 있는 노동자와 영세 자영인에 대한 지원은 간접적이거나 실효성이 의심스러운 정책들이 대부분이다.

패권국가인 미국에서도 정세는 유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현재 미국의 공화당·민주당 의원들은 코로나19 사태를 빌미로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위기의 조짐을 보였던 대기업과 금융기관들을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밀실협상으로 추진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 보도에 따르면 대중의 공포를 활용해 기업주 힘을 강화시키는 법·제도를 관철하는 데 “위기 상황만큼 좋은 때는 없다”고 워싱턴의 로비스트들이 환성을 내지르고 있다고 한다.

감염병의 대규모 확산이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코로나19 사태는 아마 조만간에 불길이 잡힐 것이다. 그러나 지구 환경 파괴, 공공보건 체제 약화 등으로 인해 발생한 감염병 팬데믹(대유행)은 근본요인이 해소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게다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세계경제는 이번 사태로 한층 더한 위기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기업 복지에서, 사회보장에서 단절된 불안정노동자와 영세 자영노동자들은 이러한 위기에서 가장 먼저, 가장 심대하게, 그리고 가장 오래 고통받을 가능성이 높다. 위기에 대응한다며 재벌과 기업주에게 더욱 힘을 실어 주는 정책들은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도 제도로 안착될 가능성이 높다. 코로나19 사태는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위기의 촉발요인이며, 코로나19 사태의 위기가 사회 전반의 위기로 전화하지 않도록 이번에는 눈을 부릅뜨고 제대로 된 구조개혁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노동권 연구활동가(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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