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우 변호사(민변 노동위원회)

1. “억울해 미치겠다. 모두 알고 있지 않을까? 왜 그런데 부정하고 거짓을 말하나.” CJB청주방송의 이재학 PD가 지난 2월4일 남긴 유서의 일부다. 미칠 정도의 억울함, 그래서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그 억울함. 그건 청주방송에서만 14년 이상 근무를 통해 온몸으로 증명하고도 남는 자신의 근무실태와 노동자성이 소송 내내 청주방송의 기만과 왜곡으로 뒤틀리고, 그런 기만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밝혀주리라 기대했던 법원마저 이에 편승한 편향된 판결을 선고한 것에 대한 분노였고 좌절이었다.

2. 2004년 청주방송에서 일을 시작해 2018년 4월 해고되기까지 고인은 청주방송에서 ‘프리랜서’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의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고인은 청주방송 소속 정규직 PD 등과 동일한 방식으로 회사 지시에 따라 조연출 또는 연출 업무를 장기간 수행한 것을 넘어 정규직의 두 배 가까운 프로그램을 소화했으며, 조연출과 연출 본연의 업무라 볼 수 없는 다양한 행정업무·대외업무·계약관계 업무까지 회사 지시로 수행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고인은 청주방송 노동자임을 확인받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번 싸움은 노동자냐 프리랜서냐 하는 구분이 아니라 하나의 실체에 대한 실명과 허명의 대결이다. 이번 싸움은 기본적으로 고인과 청주방송 사이의 것이었지만 어쩌면 우리 스스로 이러한 구분 짓기에 익숙해져 있다는 점에서 고인의 노동자성을 확인받는 싸움임과 동시에 우리 내부에 도사리는 이분법의 경계를 허무는 싸움이 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3. 고인은 청주방송의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물론 청주방송 노동조합의 조합원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이런 점에서 고인의 사망을 둘러싸고 노동자냐 아니냐 하는 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문제뿐만 아니라 조합원이냐 아니냐 하는 우리 내부의 문제도 돌아볼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고인의 사망을 둘러싼 여러 논의와 투쟁 과정에서 언론노조와 산하 청주방송지부는 각 두 차례의 성명을 통해 이 문제에 적극적인 연대의 의지를 표명했다. 언론노조와 지부의 현실적 여건과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는 마당에 이와 같은 의지 표명, 그리고 이에 부응하는 실천적 모습이 진상조사위원회의 출범을 가능하게 한 주요 동력이었다고 평가한다. 고인이 형식적으로는 언론노조 조합원이 아니었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이미 조합원이었어야 한다는 단결의 정신으로, 고인의 사망 이후 노조와 지부가 견지한 태도가 이후에도 지속된다면 이번 싸움은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다고 본다.

4. 시민사회와 유족, 노사가 합의한 진상조사위가 출범했다. 선례에 비춰 보면 향후 진상조사위 활동에 사측의 방해와 조사 거부 등이 예상된다. 이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형사고발이나 민사소송, 기관 진정 등이 아니라 청주방송 내의 모든 노동자들이 노동자냐 프리랜서냐, 조합원이냐 아니냐가 아닌 ‘노동자’의 단일한 이름으로 회사의 행태를 감시하고 진상조사 과정에 적극 협력할 수밖에 없는 환경과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고인의 사망으로 촉발된 이번 싸움에서 노동자의 단일한 이름으로 공동대응을 할 때 비로소 진상조사위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고인의 그 절절한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길이 열릴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업장 내 다양한 이름으로 구분되고 분절된 노동의 힘을 결집하고 새로운 미래를 예비할 수 있다면 이것이 이번 싸움의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지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5. “안녕하십니까? 청주방송에서 무늬만 ‘프리랜서’ PD였던 이재학입니다. (…) 지난 1년여의 소송 기간 중 알게 모르게 저를 도와주고 응원해 준 내부 구성원들에 대한 2차 가해와 견제로 인해 이제 제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저를 피하는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파 더 이상의 피해를 방지하고자 글을 남깁니다. (…) 정말 CJB를 아꼈고 저도 청주방송의 구성원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송에서 사측의 주장을 듣고 있자니 모든 게 부정당하는 기분입니다. 제 실체가 없어지는 기분입니다. 처음 하는 소송이고 당연히 있던 사실이었기에 쉽게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리한 시간끌기와 사측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고 승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돼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다시 좋은 모습으로 청주방송에서 꼭 인사드리겠습니다.”

유족이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청주방송 구성원들에게 드리는 글’의 일부다. 소송이 한창이던 2019년 8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고인이 14년을 함께한 청주방송 구성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절절한 심정을 담아 작성한 글이다. 당시 고인의 심정과 고민은 결국 어느 하나 해소할 곳을 찾지 못한 채 헤매다가 ‘억울하다’는 또 다른 글로 마감하고 말았다.

6. 이제 고인은 우리 앞에 없고, 고인이 남긴 숙제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 ‘우리’의 숙제인 만큼 모두가 함께 풀어 갔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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