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우리 사회가 ‘소수자’라 칭하는 존재들이 있다. 여성·장애인·청소년·이주노동자·성소수자가 대표적이다. 소수자는 사회의 권력관계 속에서 그 특성이 소수에 위치하는 사람의 입장이나 집단이다.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시스템, 문화 등이 어떠한가에 따라 기존 성원도 얼마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차별을 만들어 내는 권력관계가 무엇인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여성과 남성 둘만 존재한다고 여긴다. 이분법 속에서 여성의 역할, 남성의 역할을 나누고 각 성에 적합한 직업이 있다고 여긴다. 이런 생각은 오래전부터 최근까지도 문제가 되고 있다. 예를 들어 돌봄영역의 노동은 여성이 해야만 하는 일, 혹은 잘하는 일로 여겨져 왔으며 소위 힘을 써야 하는 일, 기술이 필요한 일에 여성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지난달 22일 펴낸 ‘고용 성차별, 어떻게 깰 것인가’ 이슈페이퍼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5년 동안 상담 내용에서 고용상 성차별이 1천170건으로 연평균 234건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취업이나 이직을 준비하는 여성들의 면접 경험담을 들어보면 한 번씩은 성차별을 경험한다.

이처럼 현실에서 직업을 선택할 자유는 모두가 누리는 권리가 아니다. 사회가 정한 규범과 역할 논리 속에서 결정돼 왔다. 많은 여성들이 문제를 제기했고 싸워 왔다. 그 결과 아직 나아갈 길은 멀지만 성과가 조금씩 있었다. 여전히 규정에도 없는 외모·복장 규제가 여성에게 영향을 미쳐 종일 근무하는 상황에서 눈에 피로함을 느껴도 안경을 끼는 ‘용기’를 내지 못하는 여성들이 상당수다.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유해위험요인에서 벗어나는 데 용기를 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인간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고정관념은 현실을 강제하고, 다양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의 건강(권)마저 훼손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여성과 남성 둘로만 나눠 사고하는 것 역시 지금까지 발전해 온 인권 개념을 후퇴시킨다. 실제 인간의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은 다양하다. 이 세상엔 이분법적 성별로 설명되지 않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존재에 무감각하다. 이러한 무감각은 어디서 연유할까.

감각의 훼손은 누군가의 권리를 훼손하는 것과 연결된다. 또한 존재 자체를 지우는 것도 큰 영향을 미친다. 존재를 지우는 일은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10명 중 7~8명의 성소수자는 직장에 다니면서 단 한 명의 동료에게도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 말인즉슨 매일 마주하는 동료 중 성소수자가 있음에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소수자 노동자들은 동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차별과 혐오, 배제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성소수자자살예방프로젝트 마음연결’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성인 성소수자(LGB,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의 자살생각(응답자 2천325명)은 일반 인구에 비해 8.95배(34.6%)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중 성인 트랜스젠더 응답자 256명 중 53.9%가 지난 1년간 자살생각을 했고, 15.1%가 지난 1년간 실제 자살시도를 했다고 응답했다.

자살을 생각하기까지 그리고 실제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어떤 경험을 할까.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겪은 사회적 폭력 경험은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성적 지향으로 인한 집단따돌림, 만 19세 이후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 경험, 만 19세 이후에도 언어폭력·신체적 폭력·성폭력 같은 사회적 폭력을 경험한 것으로 확인됐다. 청소년·비청소년 성소수자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일터와 학교라는 곳을 안전한 공간이라고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과도 같다.

이런 현실에서 최근 노동자 권리 확장을 위해 ‘목숨’을 건 발표가 있었다. 바로 변희수 하사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기갑병과 전차승무 특기로 임관 후 군 복무를 이어 가다 지난해 겨울 소속 부대의 승인을 받고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태국에서 성전환 수술(남→여)을 받았다. 변희수씨는 오랫동안 직업군인을 꿈꿔 왔기 때문에 자신의 성별이 바뀌더라도 여군으로 계속 군 복무를 이어 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육군측은 성전환 수술은 “군인사법 등 관계법령상 기준에 따른 ‘계속 복무할 수 없는 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며 전역 결정을 내렸다. 변희수씨가 어떤 고민과 과정 속에서 결심을 했는지는 고려되지 않았다. 부사관특성화고를 졸업한 후 직업군인으로 근무한 그녀는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육군본부에서 ‘해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기 몸의 권리가 얼마나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노동자의 권리는 다양한 정체성과 조건을 가진 이들의 선 자리에서 시작돼야 한다. 변희수씨의 상황처럼 많은 노동자들이 소위 정상성 범주에서 탈락한 타자로 치부된다. ‘인간’의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 것인가. ‘노동자로 적합한 몸’은 누가 인정하는 것인지 질문이 필요하다. 노동안전보건 역시 이 현실에 맞춰 가야 한다. 노동자 건강권의 개념이 확대되는 것은 기존의 건강권 개념을 문제시하고, 재구성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우리가 기존에 주요 핵심 권리라 강조했던 알권리, 위험을 거부할 권리, 참여할 권리, 치료받을 권리는 그렇게 발전해 나간다. 변희수씨가 자기 존재를 인정받는 것, 노동자가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인정받는 것은 노동자의 권리가 더 진일보할 수 있느냐 마느냐의 중요한 골든타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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