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연배 보건의료노조 선전홍보실장

새벽 5시20분 부산히 움직이는 청소기구, 물건을 나르는 수레바퀴 소리에 잠이 깬다. 가장 먼저 눈 비비고 일어나 농성장에 마련된 고공농성 현황판에 213이라는 숫자를 갈아 끼우고 그 옆에 세로 현수막에 ‘단식농성 21일째’ 날짜를 붙인다. 그리고 두 개의 몸벽보에 “단식농성 21일차” “단식농성 17일차” 종이를 붙인다. 그리고 동조단식자를 위해 몇 개의 몸벽보를 정리하고 낮은 책상과 의자를 정리한 뒤 현관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어둠이 진하다. 건물 외벽에는 “영남대의료원 개원 40주년, 의대 교수 1인당 논문 실적 3위”라는 초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70미터 고공에 박문진 해고자가 위태롭게 ‘매달려’ 농성을 시작한 지 29일로 꼭 213일째다. 사태 해결을 촉구하며 지난 9일 단식을 시작한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21일째, 이길우 민주노총 대구본부장과 김진경 영남대의료원 지부장은 17일째 단식농성 중이다.

지난 28일 보건의료노조와 민주노총대구지역본부와 영남대의료원노조 정상화 범시민대책위원회는 영남대의료원 호흡기센터 옆에서 고공농성 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한재숙 영남학원 이사장이 사태 해결에 즉각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조탄압 기획의 주도자들은 법적 처벌을 받았는데도 노조탄압에 희생당한 해고자 복직을 거부하고, 7개월간의 고공농성과 20일 넘는 단식농성을 외면하고, 사적조정안을 수용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을 번복했다. 노사 대표자 간 합의를 무산시켜 버리는 영남대의료원의 모습은 지극히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며, 철저히 반인권적이고 반사회적이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설명절 전 노사 대표자 간의 교섭을 통해 어렵게 만들어 낸 합의 내용조차 무참히 뒤집는 것은 영남대의료원 내부 의사결정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영남대의료원을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는 학교법인 영남학원 이사장이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공농성이 200일이 되던 지난 16일부터 대구지역의 노조·정당·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은 설연휴 전까지 영남대의료원 문제를 해결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나순자 위원장·이길우 본부장·김진경 지부장 외에도 장태수 정의당 대구시당 위원장과 황순규 민중당 대구시당 위원장이 16일, 서창호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가 17일, 김승무 인권실천시민행동 대표가 20일 단식에 돌입했다. 또한 13일부터 매일 수많은 대구지역 노조대표자, 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동조단식단에 합류해 23일까지 농성을 함께했다. 213일 동안 지속되고 있는 농성과 선전활동, 저녁 문화제에도 매일 지역의 노조 대표들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한 사업장의 문제 해결을 위해 수많은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동조단식까지 나선 일은 드문 일이다. 이는 14년 동안 이 문제를 무시한 영남대의료원의 반인권적 행태에 대해 분노하고 200일 넘게 ‘하늘감옥’에 있는 고공농성자의 절박함을 누구보다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를 해결해야 할 영남대의료원 경영진은 애써 이를 외면하며 시간만 끌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사태가 발생하게 된 배경에는 기획된 노조파괴 공작이라는 반헌법적 범죄행위가 자리 잡고 있다. 노조파괴 업체 ‘창조컨설팅’이 14년 전 노조파괴 컨설팅을 처음 시작한 곳이 바로 영남대의료원이었다.

2006년 영남대의료원지부는 주 5일제 도입 이후 부족한 인력충원과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을 요구하며 3일간 부분파업을 했다. 병원 사업장의 파업권을 봉쇄했던 ‘직권중재’ 제도가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사용자는 불성실 교섭으로 시간만 끌었고 지부가 파업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노조를 파괴했다. 폭력을 동원한 노조활동 방해와 기획적인 조합원 탈퇴 공작을 했고 이로 인해 950명에 이르던 조합원이 70여명으로 줄어들었다. 노조간부 10명이 해고됐다. 대법원 판결로 7명은 복직됐으나 3명은 끝내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고 14년을 거리에서 처절하게 싸웠다.

2012년 창조컨설팅의 불법적인 노조파괴 공작이 국회 청문회 과정에서 폭로됐다. 당사자가 처벌을 받고 자격이 박탈됐는데도 영남대의료원 사용자측은 대법원 판결을 핑계로 대며 복직을 허용할 수 없다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노조간부들은 조합원들의 뜻을 모아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앞장서 행동한 죄밖에 없다. 노동자의 파업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던 ‘직권중재 제도’라는 구시대 유물이 좀 더 일찍 폐지됐거나 불법적인 노조탄압을 기획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일터로 돌아가기 위해 그들이 감내했던 날들, 14년 피맺힌 절규, 213일의 고공농성과 20일 넘는 단식농성도 여전히 부족한가?

이것은 법 이전에 양심에 관한 문제다. 지금 70미터 허공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것은 해고자 박문진이 아니라 이 시대 정의와 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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