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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를 버텨 낸 늙은 항구도시, 말레이시아 말라카
▲ 최재훈 여행작가

여행자들에게 ‘말라가’라는 이름은 스페인 남부 휴양도시 ‘말라가’로 우선 통한다.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와 지중해의 목구멍인 지브롤터 사이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내게는 이국적인 여행 냄새를 처음 알려준 이곳, 말레이시아의 말라카가 먼저 떠오른다. 말레이반도 남쪽, 수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버스로 3~4시간이면 닿는 곳에 자리 잡은 소박한 크기의 항구도시 이름은 ‘말라카’다. ‘믈라카(Melaka)’의 옛 이름이다. 여행객들은 말라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스페인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스페인보다는 오히려 포르투갈과 관계가 깊다. 16세기부터 거의 500년 가까이 겪어야 했던 식민지 역사의 출발점이 바로 포르투갈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말라카 왕국을 멸망시킨 포르투갈에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차례로 이 도시의 주인 행세를 한 것이 20세기 말레이시아 독립 전까지의 일이었으니 그리 유쾌한 인연은 아니다. 글을 쓰는 것이 2020년이고, 말라카에 가 본 것은 2012년. 8년 가까운 시차가 있는 며칠의 기억이라, 이것으로 말라카에 대해 얘기한다는 게 ‘정보’로서는 큰 가치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오래된 도시답게 느리게 변하는 곳인지라 말라카의 냄새 정도는 크게 엇나가지 않게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라카 여행의 시작점은 네덜란드 광장에 있는 붉은 벽돌 교회 “크라이스트 처치 믈라카 1753”이다. 구글에 단골로 등장하는 붉은 벽돌담이 워낙 강렬해서 말라카를 여행하면서 이곳을 지나칠 수는 없다. 기억이 흐릿하긴 하지만, 말라카를 가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아마 이 붉은 벽돌 교회가 주는 낯선 기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가면 여기가 유럽 어느 도시인가 싶은 느낌을 주는 운하가 있어, 뱃놀이를 즐기려는 이들에게도 광장은 좋은 출발점이 된다. 도시를 관통하는 뱃놀이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말라카 운하도 낮보다는 밤에 들러 운하 주변의 불빛 흘러내리는 경치를 보는 것이 백배 나은 선택이다. 광장에서 운하 반대편으로 방향을 잡고 땀 좀 흘리며 오르막을 타다 보면 세인트 폴 교회와 마주친다. 이곳은 말라카 식민지 역사의 상징 같은 곳이기도 하다. 교회는 본디 포르투갈인들을 위한 성당으로 지어졌다. 포르투갈에 이어 말라카를 차지한 네덜란드인들은 이곳을 성당이 아닌 묘지 겸 교회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수백 년 풍파를 겪다 보니 지금은 외벽만 겨우 보존하고 있는 신세다. 말라카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서 도시 전체를 내려다보는 조망은 식민지 점령자들의 욕망의 시선이었을 테다. 지금은 여행자들의 몫이 돼 국적을 가리지 않고 말라카 파노라마를 제공해 주는 곳이 돼 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여행자들은 자연스레 광장으로 모여든다.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에는 현지인들도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중 가장 특이한 볼거리는 온갖 캐릭터와 꽃을 주렁주렁 매달고 빽빽거리는 경적과 대형 파라솔을 장착한 관광 꽃 자전거 되겠다. 언뜻 보나 자세히 보나 유치찬란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지만, 한 번 타 보면 생각이 확 바뀌는 묘한 녀석이다. 파라솔 하나가 만들어 주는 그늘 아래에서 솔솔 부는 자전거 바람을 타고 동네 한 바퀴 마실 가듯이 광장 주변을 돌고 나면 기분전환이 확실히 된다. 취향에 맞는 캐릭터 자전거를 고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선택이 될 수도 있다.

말라카는 내게 세 가지 첫 경험을 선물해 준 곳이기도 하다. 첫 번째는 딤섬. 인생 첫 딤섬을 먹어 본 곳이 바로 이곳 말라카였다. 묵었던 한인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집이 새벽녘에 문을 열어 오전 11시가 되면 완판하고 문을 닫는 동네 딤섬 맛집이었다. 아침잠 깨러 나와서 하품하다가 북적거리는 모양새를 보고 ‘맛집이구나~’ 싶은 마음에 얼떨결에 인생 첫 딤섬을 영접하게 된 거다. 뭘 어떻게 시켜야 할지도 모르고 그냥 손짓 발짓으로 두어 접시 주섬주섬한 게 전부였지만. 두 번째도 역시 음식인데, 인생 첫 인도-파키스탄 음식을 만난 곳도 이곳 말라카였다. 카레라면 삼분카레밖에 모르던 시절이었는데, 강변에 자리 잡은 이곳 파키스탄 식당에서 탄두리 치킨부터 시작해, 난과 비르야니(그 동네 볶음덮밥)는 물론, 백반인 ‘탈리’까지 먹어 볼 수 있게 해 준 곳이 이곳 말라카였다. 여행에서 동네 음식을 먹는 재미를 알려 준 곳이랄까? 세 번째 첫 경험은 ‘하모니 스트리트’와의 만남이었다. 이슬람 모스크와 힌두 사원, 그리고 불교 사원이 나란히 숙소 앞의 긴 골목을 따라 제각각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지리를 전공한 아내의 말에 따르면 이런 거리를 ‘하모니 스트리트’라고 부른다고 했다. 기도 시간을 알리는 모스크의 ‘아잔’ 소리가 낮게 깔리고, 골목으로 은근하게 퍼지는 불교 사원의 향냄새가 어색하지 않은 이곳에서만은 테러니 종교 갈등이니 하는 얘기는 저세상 잡소리에 불과했다. 대단한 관광거리 하나 없이도, 마음이 끌리고 잔상이 오래 남는 도시임에 틀림없다.

여행작가 (ecocjh@naver.com)

최재훈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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