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 피해자가 근무하던 작업장 내 상병 발병 유해인자 수치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에서 규정한 기준치에 미달했다고 해도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노출됐다면 업무상질병에 해당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16일 금속노조 법률원·민주노총 전북본부·반올림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3부(재판장 박성규)는 지난 10일 이아무개씨의 업무상질병을 불인정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이 제기한 유족급여·장의비부지급처분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고인은 2012년 LG디스플레이·삼성전자 등에 전극보호제·세정제·전자재료를 생산해 납품하는 한솔케미칼에 입사했다. 한솔케미칼에서 생산업무를 담당하던 고인은 입사 3년10개월 만인 2015년 급성림프구성백혈병에 걸렸다. 고인은 2016년 8월 숨졌고 유족은 근로복지공단에 “업무상재해로 사망했다”며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고인이 숨진 후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보고서를 인용해 백혈병을 유발한 주요 유해인자인 벤젠·포름알데히드·1, 3-부타디엔 등에 고인이 노출된 정도가 기준치에 미달한다며 신청을 불승인했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사업장이 개별적인 화학물질 사용에 관한 법령상 기준을 벗어나지 않아도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망인은 사업장에서 발생한 벤젠 등 백혈병 유해인자에 지속적으로 노출돼 병에 걸렸고 병의 악화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한솔케미칼이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실시한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에 벤젠·포름알데히드·부타디엔 등 유해인자를 측정대상에서 제외한 점을 지적하며 “망인이 위 기간 동안 각 유해인자에 노출된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고 꼬집었다. 이어 “사건 발병 이전에 각 유해인자에 대한 노출방지 조치를 적절히 취했는지도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서울행정법원은 직업병 피해자가 주요 유해인자에 얼마큼 노출됐는지 알 수 있는 자료 제출을 거부한 사업주와 관련 행정청의 태도를 언급하며 “고인에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소송 과정에서 한솔케미칼은 물론 산업안전보건연구원·안전보건공단은 업무상 비밀을 이유로 직접 수행한 공정과 물질에 관한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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