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마르크스주의 정세분석 방법은 장기 법칙 속에서 단기 변화를 분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결론 내린 장기 법칙은 자본주의적 성장이 필연적으로 과잉자본과 과잉인구로 나아간다는 것이었다. 과잉자본은 수익성 없는 자본이 늘어난다(이윤율이 하락한다)는 의미다. 과잉인구는 당대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인구가 증가한다(궁핍화라고도 표현한다)는 뜻이다. 요즘 표현으로 저성장과 장기침체가 이어지면서 ‘헬조선’ 시민이 증가한다는 말이다.

단기 변화는 지배계급의 통치전략과 피지배계급의 투쟁으로 이뤄진다. 지배계급은 자본주의의 경제적·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의 기본 방향은 소유권과 시장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반면 피지배계급은 시민권과 생존을 위해 서로를 조직해 투쟁한다. 지배계급이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전가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피지배계급은 싸우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풍요와 시민권을 누릴 수 없다. 단기 정세를 분석한다는 것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제도개혁과 불만관리 정책을 두고 어떻게 서로 갈등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단기적 정세는 장기 법칙의 제한을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만 변화한다.

장기 관점에서 21세기 정세의 기본 방향은 과잉자본과 과잉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래 미국 경제는 이윤율 하락을 겪고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약간의 이윤율 반등이 있었지만 대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2007~2009년 세계 금융위기는 다시금 이윤율 하락의 위기가 본격화되는 계기였다. 이후 세계 경제는 10년 넘게 회복되지 못했다. 부동산부채 위기가 금융위기로, 재정위기로, 무역전쟁과 기업부채로 반복될 뿐이었다.

2020년 세계 경제의 최대 이슈는 무역전쟁과 기업부채다. 봉합된 미중 무역갈등이 어떻게 전개될지, 브렉시트 이후 무역협정을 어떻게 체결할 수 있을지가 초미의 관심사다. 일반적 관측은 만족스러운 해법은 없다는 것이다. 풍요가 아니라 손실을 나눠야 하는 국면이라 누구도 쉽게 관세를 양보할 수 없다. 기업부채는 숨겨진 경제위기의 뇌관이다. 최근 몇 년간 기업부채는 2000년대 가계부채 증가속도를 넘어설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 부동산부채로 만든 파생금융상품처럼 기업부채로 만든 파생금융상품도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세계 금융위기를 가져온 부동산파생상품보다 규모도 더 크다. 부채가 부채로 이어지는 이 연쇄구조가 지불의 연쇄로 바뀌면 2007년 이상의 금융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중국 경제 역시 폭탄이다. 금융위기에서 세계를 구한 중국은 이제 또 다른 경제위기의 방아쇠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국영기업 부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상태인데, 국영은행들의 묻지마식 대출로 거품성장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1996년 한국 재벌들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외환보유고가 엄청나 97년 한국처럼 당장 외환위기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미중 무역갈등 이후 불안정성이 더 커졌다. 미국 증시의 비이성적 열광 역시 위험하다. 양적완화로 풀린 돈이 초과지급준비금으로 은행에 보관돼 있다가, 2016년부터 증시로 풀렸다. 부채와 거품은 성장에 대한 기대가 감소하면 터지기 마련이다. 한국의 경우 전형적인 추격성장 위기를 겪고 있다. 70년대 중화학공업과 90년대 첨단산업이 선진국을 추격한 이후 그다음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 중인 고령화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세계 경제의 기침에도 한국경제는 앓아눕는 상황인데, 2020년 상황은 그보다 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은 어떤 제도개혁을 준비하고 있는가. 2007~2009년 이후 최고의 제도개혁은 중앙은행의 양적완화와 정부 재정확대였다. 하지만 이 정책들은 더 이상 사용하기 어렵다. 이미 엄청나게 늘어난 중앙은행 자산과 정부 부채가 자칫 화폐가치를 붕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지배계급은 국내 정책수단이 없자, 무역전쟁 같은 대외정책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세계 경제를 더욱 큰 혼란으로 이끈다. 한국도 제도개혁 대상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다. 소득주도 성장이 부작용만 남긴 상태에서 혁신성장·공정성장은 사실상 박근혜 때의 창조경제 재판에 불과해 보인다. 정부나 기업이나 혁신의 대상도 공정의 대상도 찾지 못한다. 2020년 재정확장 여력은 남아 있겠지만, 잠재성장력이 없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위기를 극복할 만한 제도개혁이 부재한 가운데 지배계급의 남은 선택지는 정치적 ‘주술’뿐이다. 포퓰리즘 말이다. 2020년 미국 대선에서 양당의 포퓰리즘이 불을 내뿜을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감세·이민자 공격·무역전쟁 등으로 소외된 백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민주당 후보들은 트럼프 이전으로 되돌아가자는 반트럼프나 불평등·환경문제 등을 재정적자로 해결하자는 반경제학적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

한국 상황도 비슷하다. 21대 총선 전후 집권세력이 제기하는 쟁점은 진정한 제도개혁이 아니라 상대방을 악마화하는 정치일 뿐이다. 저성장 인구감소 시대의 첨예한 쟁점들, 예로 청년실업·노인빈곤·국민연금·재정적자 같은 문제는 제대로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답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는 자극적 소재만 올해 내내 찾아내려 할 것이다.

한국의 경우 경제침체에 더불어 지정학적 위기가 더해져 있다는 점도 주의를 필요로 한다. 지정학적 위기는 다른 모든 쟁점을 날려 버릴 만큼 강력하다.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는 북한, 미국 패권에 계속 도전하려는 중국, 전쟁 가능한 국가로 가겠다는 일본 집권세력 모두 평화로운 방식으로 수렴되기 어렵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낭만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낙관적이고 주관적이다. 자칫 정부의 선의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한편 세계적으로나 한국에서나 노동자 투쟁은 단기 정세의 공백으로 남아 있다. 2020년에도 획기적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노동자운동이라는 정세의 공백이 몇 년간 정세변화의 마지막 변수가 될 것이다. 1노총이 된 민주노총의 분발이 필요하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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