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근본은 중요하지만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는 다르다. 세상을 알고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근본을 알아야 한다. 지식을 쌓아야 한다. 물론 지식은 앎으로 이어져야 하고 앎은 의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의식이 형성돼야 실천을 할 수 있다. 지식을 바탕으로 세상을 알게 되면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와 이롭고 해로운지를 알게 된다. 옳은 게 항상 이로운 게 아니듯, 그른 게 늘 해로운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그릇된 것이 이로울 때가 많으며 옳은 것은 해로움, 즉 희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앎에만 그친다면 해로운 것은 안 하고 이로운 것만 골라서 할 가능성이 크다. 손해와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행동에 나서려면 그에 걸맞은 의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의식과 행동 사이에는 양심과 용기가 자리 잡고 있다.

세상 잡사에 대한 지식에 앞서 근본에 대한 앎이 필요하고, 이는 의식 형성의 전제조건이 된다. 의식은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좋은 일을 하려는 양심과 용기로 이어지고, 이는 실천의 출발점이 된다. 하지만 근본이 모든 것이라는 근본주의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근본에서 현상과 본질이 자라고 형식과 내용이 생긴다. 근본을 끊임없이 지향하되 현실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정과 사건을 감안해야 한다. 숲을 바라보는 동시에 각각의 나무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근본은 다름을 인정하지만, 근본주의는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법률은 중요하지만 법률주의(legalism)는 문제가 있다. 법률주의란 법률이 현실을 창조한다고 믿으면서 법률의 틀 안에서 사고하는 것을 말한다. 법률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사고는 여기서 나온다. “있으나 마나 근로기준법”이라는 노동가 노랫말에서 알 수 있듯이 법률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법의 지배(the rule of law)와 법치주의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법치는 중요하지만 법치주의는 위험하다. 법치는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법치주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조건 법을 따라야 한다는 강요로 나아간다. 독재국가일수록 법률은 촘촘하고 복잡하고 상세하다.

법치주의는 법으로 지배하는(the rule by law) 세상을 말하며, 이는 법률 만능주의로 이어지면서 결과적으로 법률가의 지배(the rule of lawyers)로 타락한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국회 의석의 상당수를 법률가들이 장악하고 있다. 이런 사정은 미국이나 유럽도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한계에 다다르며 세계 도처에서 그 수명을 다해 가는 원인을 ‘법의 지배’가 ‘법률가의 지배’로 대체된 데서 찾는 이들이 있다.

노동운동이 점점 법률주의에 포획돼 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법 테두리 안에서, 다시 말해 재판에서의 승소 가능성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의 쟁점을 다루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이런 입장을 가지게 되면 법률 문구가 대단히 중요하게 되며, 노동운동은 그런 법률 문구를 바꾸는 투쟁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원하는 문구대로 법률이 바뀌지 않으면 운동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태도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대립과 갈등을 법정에 가기 전에 끝내려 하지 않고, 법정에 가서 법률 문구의 해석으로 끝내려 한다. 이렇게 되면 노동운동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판사를 만나면 승소하는 것이고, 적대적인 입장을 가진 판사를 만나면 패소하는 것이다. 패소하게 되면 법률 문구 때문에 그렇다면서 법률 문구 개정작업에 더욱 매달리게 된다. 그래서 대중은 법 문구를 고치는 투쟁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고, 반면 법률가는 그 투쟁의 주체로 상승하게 된다. 노동운동 같은 대중운동은 이러한 판검사와 변호사들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투쟁을 지원하는 동원부대로 기능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은 중요하지만 가족주의(familism)와는 거리가 있다. 노동계급의 해방을 목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일수록 그들이 바라는 자식의 미래가 노동계급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필자는 조국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검찰개혁을 철저히 수행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그가 노출한 가족주의 편향까지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는 것은 당연하다. 3대가 망하지 않고 가능한 독립운동은 없다. 자기 대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희생하니까 자식이나 손자는 복락을 누려야 한다는 태도라면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

노동운동도 그 비슷한 어디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을 노동운동가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만 본인이 운동을 함으로써 자식도 노동자가 될 수 있거나 돼야 한다는 정도의 각오가 없다면 진정한 노동운동은 불가능할 것이다. 예수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을 버렸다. 부처도 처자식을 버렸다. 세상을 바꾸자고 나선 사람 중에 가족을 제대로 챙긴 사람이 없다. 사실 가족주의는 미국 자본주의 문화의 산물이다. 가족 때문에 임기를 마치지 않고 중도에 하차한다고 광고하는 미국의 지배 엘리트를 자주 볼 수 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이야 일도 하고 가족도 챙길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일과 가족 모두를 챙기기 어렵다. 일을 희생하든 가족을 희생하든 어느 한쪽의 희생은 불가피하다.

새해 노동운동의 운세를 생각해 본다. 근본은 없고 ‘주의’만 남은 것은 아닐까. 법률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닐까. 혹시 가족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국내외적으로 2020년 새해는 안정과 평강보다는 혼돈과 격변의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향후 20~30년 동안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동운동 앞에 영광은 없고 만난(萬難)이, 승리는 없고 패배가,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본-법률-가족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중심에 놓는 '이데올로기'에 매몰돼서는 안 될 것이다. 3대가 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운동은 없다. 역사를 돌아볼 때 언제나 운동의 운세는 그러한 것이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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