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추억의 만화영화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에서 까마득한 미래 세계로 그려졌던 2020년. 하늘을 나는 자동차로 가득한 세상하며 정말이지 올까 했던 그런 날이다. 2000년에 새로운 천년을 맞을 때만큼이나 묘한 기분이다. 제목만큼은 선명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는 오염된 지구를 탈출해 인간이 살아갈 새로운 행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기억된다. 지금의 지구가 탈출할 정도는 아니지만 틀린 예상도 아니다. 환경문제는 모든 세대가 함께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다. 더 이상 지구를 오염시키지 마라는 그레타 툰베리 주장이 트럼프를 압도할 정도다.

환경문제가 심각하다고들 하는데 노동문제도 만만치 않다. 2020년 오늘, 만약 “노동문제와 환경문제 중 지구를 떠나고 싶은 원인을 골라 보라”고 묻는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갈등 속에서도 그 원인과 책임, 해결책을 두고 수십 년간 전 지구적 노력이 있었다. 노동문제는 어떤가. 우리 노동현장에 비정규 노동자가 등장한 20여년 전만 하더라도 임금노동자의 절반이 비정규 노동을 하게 될 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 이름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플랫폼 노동자’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이야기를 새로 써야 할 판이다.

2010년 중반 이후 노동현장 모습은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노동해방이 아닌 노동이 사라진’ ‘노동만 있을 뿐 일자리는 없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얻지 못하는’ ‘아예 그 대가가 얼마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사용자 없는 노동’ 등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노동이 있는 곳이라면 일반화한 현상이다. 2차, 3차 산업혁명이 없었던 일부 아프리카국가에서 플랫폼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4차 산업 유형)이 가장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1·2·3차의 단계적 발전이라는 산업화 역사를 수정해야 한다. 노동현장의 모습은 나라와 사회가 가진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부의 크기나 산업화 역사, 영토의 위치, 구성원의 다양성·규모와 큰 상관성이 없다.

앞서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미리 예상해 보자. 불길하다. 지구를 떠나고 싶은 원인으로 노동문제가 더 많지 않을까 해서. 노동이 갈수록 희망이 아니라 불행을 불러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소득 7만달러를 육박하는 미국에서도 3천달러 정도의 노동자가 40%나 된다. 프랑스 같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노동선진국에서도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파업이 이어지고 있다. 하물며 나라가 부자인 것도 아니고 노동에 대한 존중이라는 말조차 꺼내기 어려운 우리나라에서 2020년을 맞이하는 노동자들은 어떨까. 노동문제가 예상을 넘어 압도적이지 않을까.

이러한 현실에 대한 진단은 그저 그렇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노동자 간 극심한 소득양극화와 노동자 간 차별 문제 등인데, 근본적인 원인을 확인하지 않는다. 진단이 잘못되면 그 어떤 명의의 처방도 효과가 없다. 지금부터는 ‘노동자 간의 극심한 양극화 또는 차별’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다시 명명해야 한다. ‘자본과 노동 사이에 전에 경험한 적 없는 극심한 불균형 그리고 파탄’이라고 불러야 한다. ‘새로운 자본’의 철저한 노동지배가 현상의 본질이다. 자본이 얼마나 많은 돈을 뿌렸는지는 알 길이 없다. 국경과 시간의 경계를 초월하며 옮기는 능력을 보여 준다. 이제야 우리도 ‘이놈이 누굴까’ 의심하고 그 정체성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이다.

2020년에 환경만큼이나 큰 문제는 ‘노동이 사라진 시대’가 이미 한참 진행됐다는 사실이다. 노동자의 가치는 없다. 이런 오늘의 노동환경을 두고 ‘18세기나 19세기로 돌아갔다’고 평가한들 이상할 게 없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자본을 풀어놓기만 했던 야만의 시대였다. 그 결과는 노동의 부재였다. 반성이 이어졌고 불완전하지만 노동과 자본의 균형을 찾았다. 지난 100년간 국제노동기구(ILO)와 필라델피아 선언처럼 ‘노동’이 자본을 견제했다. 제조산업을 중심으로 한 세상에서 상당한 효과를 봤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효가 다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자본’을 전혀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존 같은 방식으로 노동과 사용에 대한 정의는 의미가 없어졌다. 누가 사용자고 누가 노동자란 말인가. 양자를 구분하거나 찾을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의 설계가 필요하다. 지금 자본의 실력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20세기 방식은 안 된다. 과거 방식의 노동자-사용자 틀만 고집할 수는 없다. 자본의 개념과 책임을 새로 정해야 한다. 때를 놓치면 2020년 그 어느 때엔 ‘지구 탈출’이 본격화할 것이다. 난민노동이 전 지구적 문제가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나.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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