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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민의 노동법을 위하여
▲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흔히 말한다. 노동법은 약자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라고. 예를 들어 “노동법은 사용자에게 노무를 제공하고 그 대가를 얻어 생활하는 근로자를 위한 보호법”(김형배)이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또는 “노동 3권의 보장 필요성”(대법원)이라는 기준을 적용해서 어떤 노동자에게 단결의 자유를 인정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같은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노동법은 “위민(爲民)의 노동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노동자를 위한다고 하니 좋은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위민의 노동법은 노동자를 대상화한다. 위민의 노동법은 약자인 노동자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간주되는 어떤 존재가 노동자를 “위하여” 베푸는 시혜 또는 “국가에 의한 후견적 배려로서의 특별법”(김형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위민의 노동법은 가부장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관점이다. 위민의 노동법은 노동자를 권리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국가의 노동정책 또는 경제정책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 위민의 노동법에는 민주주의적 관점이 결여돼 있다. 노동법의 탄생 초기에는 위민의 노동법이 정당화될 수 있었을지 몰라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거쳐 온 21세기에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

21세기의 노동법은 위민의 노동법이 아니라 “여민(與民)의 노동법”이 돼야 한다. 여민의 노동법은 노동자 스스로의 능력과 지혜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뒷받침하는 법이다. 노동자는 보호 대상이 아니라 노동법의 주체다. 노동법은 노동자 보호법이 아니라 노동자 자유법, 즉 노동자를 자유로운 법 주체로 제정하는 법이다. 이를 위해서 기본적인 노동조건과 사회안전망을 보장하고 단결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다. 노동 3권은 법원이 “보장 필요성”을 검토하고 인정 여부를 결정해 주는 보호책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판단해 행사 여부를 결정하는 자유에 속한다. “노동법은 근로자가 노동을 통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력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법이 근로자 보호를 위한 시혜적인 법은 아니며, 노동력의 주체성과 자기 가치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노동력 거래에서의 대등성이 확보될 수 있도록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김유성)

한 가지만 예로 들자면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9조는 대표적인 위민적 조항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노동조합의 대표자는 조합원을 위하여 단체교섭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위하여(위민)”는 타당하지 않다. 위민의 정치가 늘 그렇듯이 “조합원을 위하여”는 결국 “대표를 위하여”로 귀결된다. 이 “위하여”의 노동법에서 노동자는 가볍고 대표는 무겁다. “협약자치의 원칙상 노동조합은 근로조건을 불리하게 변경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합의를 위하여 사전에 근로자들로부터 개별적인 동의나 수권을 받을 필요가 없다.”(대법원) 노동자를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전락시키는 위민의 노동법을 이 판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대표는 가볍고 노동자는 무겁다. “조합원을 위하여”가 아니라 “노동자와 함께(여민)”여야 한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와 함께” 행동하고 교섭하는 것이다. “위하여”에서 노동자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하지만 “함께”에서 노동자는 권리의 주체가 된다. 헌법 33조1항이 예정하고 있는 바로 그 ‘주체’ 노동조합은 노동자와 함께하고 노동자는 노동조합과 함께한다. 이 “함께”에서, 이 여민의 노동법에서 비로소 대표와 피대표 사이의 이질성은 지양될 수 있다.

시몬 베유는 두 종류의 집단, 즉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이해집단)과 어떤 개념 또는 사유를 중심으로 뭉친 집단(사유집단)을 구별했다. 이해집단이 위민이라면 사유집단은 여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집단은 위계와 규율이 용인되는 조직이 아니라 다소 유동적인 매개에 가깝다. 사유집단의 행동은 공통의 사유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동조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그 행동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행동에 나서야 할 이유가 없다. 베유에 따르면 지금까지 결사의 자유라고 불렀던 것은 사실상 결사체의 자유였다. 그런데 결사체가 자유로우면 안 된다. 결사체는 도구일 뿐이다. 자유는 사람에게만 합당한 것이다. 베유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사유와 명예를 표현하는 기관”이 돼야 한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박제성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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