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혜인 공인노무사(직장갑질119)

‘조국 사태’를 보며 한동안 ‘내가 조국 딸이었다면’을 상상했다. 부모님 덕분에 많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풍요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조국 딸이 부러웠다. 내 부모님도 평생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아낌없이 학원비와 등록금을 내줬다. 조국 딸이 조금 더 유리한 환경이었을지 몰라도, 나도 부모님 지원을 받아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도 박탈감이 밀려왔다. 조국 사태에서 드러난 그들의 ‘노력’과 나의 ‘노력’은 애초에 결이 다른 걸 감각했다.

얼마 전 읽은 소설책 주인공은 재개발 지역에 살았다. 학생 시절, 원주민과 이주민 자녀는 구분 없이 어울렸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 ‘구별’을 경험하면서 관계에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주인공은 오랜 시간 동안 원주민이라는 박탈감에서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했고, 이주민이었던 친구는 자신의 꿈을 향해 최선을 다했다. 각자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원주민은 최악이 됐고 이주민은 꿈을 이뤘다.

‘각자의 최선’이라는 말은 불평등을 전제로 한다. 노력만 하면 되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 자체가 다른 출발선이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학비와 생활비를 떠올리며 기회비용을 계산하는 건 익숙한 망설임이었다. 연구자가 되고 싶다던 한 친구는 대학원에 갈 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하다 회사에서 성희롱을 당했고 억울하게 해고됐다. 나와 내 주위 친구들은 공부를 하려면 무언가를 포기해야 했고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를 경험한다. 용기 내 공부를 선택하더라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선 치열해야 한다며 자신을 닦달해야 했다.

차별은 노골적이지만 구별은 교묘하다. 부모 재산을 상속받아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은 쉽게 비난받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엘리트 코스를 무사히 졸업한 사람은 집안도 좋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라 존경받는다. 특별한 자격이나 능력을 갖춘 사람은 고귀한 일을 하고 높은 임금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구별’이라 하고, 법적으로는 ‘합리적 차별’이라 한다. 합리적 차별은 ‘기회의 평등’ 위에 정당화된다. 당신이 비정규직이 된 건 남들 스펙 쌓을 때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폄하된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 기득권이 될 수 있고, 그것은 노력의 대가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보호돼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그렇지만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들어가거나 공무원·전문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고, 대체로 이런 여유는 타고난다.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심화하면서 불안정한 고용형태가 보편화했다. 취업을 못 하는 사람이 없었던 386세대와 달리, 지금 우리는 실업과 비정규직을 반복한다. 간혹 정규직이 되더라도 분절된 노동시장에서 대기업·공기업으로 대표되는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저 그런 일자리를 반복하다 대통령이 정규직화를 공약하면 희망을 품어 볼 뿐, 노력해도 주저앉아야 하는 낙인을 지우기란 쉽지 않다.

일하다 죽는 사람들 대다수가 비정규직이었다. 지저분하고 위험한 일을 외주화했고, 일정한 선을 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은 차별당해 마땅한 취급을 받는다. 그렇게 비정규직은 쉽게 차별당하고 쉽게 죽는다. 누구나 노력하면 대기업·공기업에 갈 수 있는 세상이라며, 비정규직이 당하는 차별은 합리적인 것으로 포장된다. 가난하고 불안정하고 어렵고 더럽고 위험한 일로 비정규직을 몰아붙인다. 덜 노력했다는 오해로, 쉽게 죽는 일을 해도 어쩔 수 없다는 세상의 시선이 가혹하다.

그렇지만 노력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단지 ‘각자의 노력’을 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밑바닥부터 노력한다. 반면 ‘있는 집’ 사람들은 1분 단위로 요금을 받는 대치동 입시 컨설턴트가 만들어 준 코스를 따르려고 노력한다. 시간을 쪼개 돈 벌고 공부하는 노력으로는 ‘있는 집’ 사람들의 노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노력만 하면 되는 환경이 주어지는 것 자체가 차별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노력’을 하며 버둥거린다. 그리고 모두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기회의 평등’이란 허상 속에 살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진작 신뢰를 잃었다. 명문대 합격률은 물론 공무원시험 합격률도 소득에 비례한다. 교육이 부를 세습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돈과 집과 학벌과 학력, 그리고 고용형태까지 자식에게 상속된다.

조국 사태의 핵심은 검찰개혁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그들의 탄탄대로는 특권 위에 형성된 것이고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예정된 것이다. 세습된 특권이 노력의 대가나 능력으로 포장되는 만큼 차별은 합리화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으니 노력하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누구에게만 열려 있는 기회를 재조정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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