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인권운동의 발전과 신자유주의의 확산은 동전의 양면이다. 미국 예일대 교수 새뮤얼 모인(Samuel Moyn)이 쓴 <불평등한 세계에서 인권이란(Human Rights in an Unequal World)>의 핵심 주장이다.

인권운동이 신자유주의와 공모하면서 최악의 물질적 불평등을 방치했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기본권을 가진다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에 기반해 인권운동이 계약의 자유와 재산권의 불가침성에 동조하면서 물질적 불평등(material inequality), 즉 사회경제적 권리를 퇴행시키는 데 암묵적으로 동조했다는 비판이다.

인권운동이 태동한 시기는 1970년대였다. 이 시기는 시카고대 경제학과로 대표되는 ‘사적’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가 발흥한 시기와 일치한다. 이즈음 민영화·규제철폐·사회보장으로부터 국가의 후퇴가 일어나면서 복지국가가 위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만인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와 민주주의로 전락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와 결별한 시장이 아니라 국가와 공모하고 결탁한 시장을 뜻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데, 한국과 칠레의 군부독재 사례에서 보듯이 시장의 자유와 국가의 억압은 늘 같이 갔던 것이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전 세계를 석권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소련으로 대표되는 국제사회주의 체제가 없었다면 체제 경쟁의 결과물인 북유럽으로 대표되는 복지국가 체제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질적 평등을 가장 명확하게 지향한 체제가 사회주의였기에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사라지면서 물질적 평등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인권운동과 신자유주의가 동시에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지 않는 만큼 인권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이는 정확하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와 일치했다. 현실에 존재했던 국가사회주의(state socialism)에 대한 부정이 물질적 평등이라는 인류적 가치를 부정하는 데로 나아갔다.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일조한 동유럽의 인권운동가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했지만, 이들은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같은 정치적 민주주의에 신경을 쓸 뿐 분배와 불평등 문제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미몽’에서 벗어날수록 물질적 불평등은 날로 악화했다.

모인 교수는 “인권운동이 신자유주의를 교사한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 불평등을 제어하려는 노력을 무너뜨리는 신자유주의적 기획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인종과 성 등의 소수자 문제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게 됐지만 물질적 평등은 최악의 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인권운동이 물질적 불평등의 급속한 확산에는 애써 눈감으면서 여성과 소수자 혹은 세대를 둘러싼 ‘지위의 불평등(status inequality)’ 문제에 매몰했고, 그 결과 ‘지위의 차별(status discrimination)’은 오히려 심화했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지위를 둘러싼 불평등은 감소하는데 지위들 사이의 차별은 강화되는 현상은 “시장 자체에 사회적 제약을 가하는 결과의 평등(equality of outcomes)을 시도하기보다 시장 안에서 기회의 평등(equality of opportunity)”을 추구한 인권운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일지도 모른다.

모인 교수는 ‘일국 복지(national welfare)’를 넘어 ‘글로벌 복지(global welfare)’를 고민하면서 국경을 가로질러 세계 전체에서 소득과 부의 격차를 해소하려는 “새로운 국제경제질서(New International Economic Order)”를 기획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적 인권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가. 분배의 불평등을 초래하는 시장에 맞서 결과의 평등을 과감하게 추진하기보다 시장 안에서 허용되는 기회의 평등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인을 위한 사회 정의와 복지를 추구한다고 말하면서도 만국의 노동자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 만인을 ‘한국 민족’으로만 국한시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기업 복지에 안주하면서 사회 복지로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국 노동운동은 “물질적 불평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인권(운동)이야말로 시장근본주의의 무력한 동반자”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까. 제3세계로부터 잉여가치를 빨아들이는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의 상층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에서 노동운동은 ‘글로벌 복지’에 대한 전망과 대안을 만들어 가고 있는가.

“오늘날 사람들은 다른 한편에서 급증하는 거대한 불평등을 바라보면서 인권에 그들의 희망을 투자하고 있다”고 모인 교수는 썼다. 기회의 평등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반면 결과의 평등은 무시당하고 있다. 지위의 평등이나 정치적 권리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처우의 평등과 경제적 권리에 대한 연구는 드물다. 자유한국당 같은 극우 정치세력도 인권을 입에 달고 살지만, 진보정당을 비롯한 모든 정치세력들에서 “분배의 평등에 대한 도덕적 약속”은 희미해지고 있다.

인권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평등의 꿈은 옅어지는 역설적 현실은 평등주의(egalitarianism)를 향한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사상을 정립할 필요성을 노동운동에 다시금 제기한다.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시장 안의 기회에 국한하는 것이 아닌 시장을 넘어선 결과에 관한 것이며, 일국적 분배를 넘어선 글로벌 분배에 관한 것이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는 필요에 따라”라는 사도 바울의 평등주의가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할 시대가 오고 있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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