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1932년 3월24일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된 직후 임종만의 모습. 임종만은 이로부터 10개월 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임종만(1892~1933)은 지금의 충남 당진시 신평면 초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이환(1899~?)·정학원(1894~1933) 등과 함께 1920년대 당진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 임종만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이래 1933년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기까지 14년에 걸쳐 줄곧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임종만의 독립운동은 고향인 당진에서 시작해 충남으로 확장하는 동시에 1920년대 조선 내 사회주의계 독립운동의 한 축을 형성했던 서울청년회를 매개로 한 전국적 활동을 병행하는 방식이었다.

고향 당진에서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3·1 혁명 이후 식민지 조선에는 제한적이나마 확장된 공간을 활용해 지역별 청년회와 노농단체 결성 붐이 일었다. 이때 임종만도 당진에서 신합청년회·당진소작조합 등을 결성하는 데 앞장섰다.

임종만은 먼저 정형택·정학원 등과 함께 동아일보 당진분국 개설에도 뛰어들어 당진지역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임종만이 1922년 당진분국 개설 당시 맡았던 역할은 외교원이었다. 외교원은 대외 업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 결성된 신합청년회의 신합은 ‘신평에서 합덕까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신평·범천·합덕 3개 면 청년들의 결사체였다. 임종만은 이를 계기로 청년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이후 청년운동의 주요 지도자로 성장했다.

당진소작조합 역시 같은해 3월27일 조이환·정학원·배기영 등 12명의 발기로 결성됐다. 신합청년회와 마찬가지로 신평·범천·합덕 등 3개 면의 소작인 조합으로 출발했는데, 범천면 영화학원에서 거행된 창립총회 당시 출석회원만 500여명일 정도로 활기 넘치는 조직이었다.

당진소작조합의 주요 기반이 된 합덕·범천·신평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평야지대인 예당평야의 한 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1920~1930년대 당시 이 평야는 경인지역과 인접한 관계로 재경 지주들이 대부분 농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자영 농민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들 재경 지주들은 소작 관리인인 마름을 통해 농민을 통제했고, 농민들은 고율의 소작료와 소작권 박탈의 위협 속에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들의 저항은 소작쟁의로 자주 표출됐고, 그 중심에 당진소작조합이 있었다.

임종만은 당시 당진소작조합 소식을 알리는 언론보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당진소작조합 발기인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청년회에 참여하면서 전 조선을 활동무대로 삼다

임종만의 독립운동은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에 기초해 이뤄지고 있었다. 임종만이 언제부터 사회주의자가 됐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주로 교류한 서울청년회 계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임종만은 이미 당진과 충남 일대에 머물지 않고 사상단체인 서울청년회 일원으로 전국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24년 7월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이 ‘암태도소작인 아사동맹 동정단’을 결성해 암태도 소작쟁의를 지원할 때 임종만은 조봉암·이정윤 등과 함께 실행위원으로 선임돼 결의문을 언론에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전남 신안의 암태도에서 벌어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무려 1년간 지속됐는데 ‘아사동맹’까지 결성하는 결사항전 끝에 ‘①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 사이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일금 2천원을 기부할 것 ② 1923년의 미납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 상환할 것 ③ 구금 중인 쌍방의 인사에 대해서는 9월1일 공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할 것 ④ 도괴된 비석은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할 것’ 등 4개항의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 소작인측 승리로 일단락된다. 이 암태도 소작쟁의는 전국적인 소작쟁의를 자극한 한국농민운동사상 최고의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한 달 후인 1924년 8월에는 평양의 오월청년회 등과 접촉해 비밀독서회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와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활동을 한 혐의로 서울청년회 한해·서정기 등 40여명과 함께 평양경찰서에 체포됐다 한 달 만에 석방되는 사건도 발생한다.

이듬해인 1925년 1월에는 서울청년회의 4회 정기총회에서 박원희·이정윤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는 점에서도 임종만은 그 이전부터 이미 서울청년회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종만은 1925년 10월10일 결성된 ‘전진회’에서도 이정윤·김사국·정백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임된다. 전진회는 조선사회운동자동맹 추진이 일제의 방해로 좌절되면서 그 대안으로 만들어진 사상단체였다. 임종만이 레닌 사망 3주기인 1926년 1월21일 전진회가 개최한 기념강연회에서 ‘레닌이즘과 마르크시즘’이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것으로 보아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조예도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종만은 1926년에는 사상단체의 전국적 단일기관 성립을 목표로 한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충남청년대회와 전국 청년단체 결성

임종만은 1925년 새해벽두부터 1년 전 결성된 전국청년총동맹 총회를 앞두고 그 기반이 될 충남청년대회 개최를 정학원 등과 함께 추진했다.

결성과 함께 전국청년총동맹 창립에 참여하면서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청년단체 지위를 확보한 신합청년회는 먼저 ‘전 당진청년 간친회’(1월29일)를 개최한 후 충남 각 지역에 선전대를 파견하면서 충남청년단체 발기대회를 준비했다. 이때 임종만도 천안과 연기 일대를 담당하는 선전대 활동을 수행했다. 하지만 발기대회마저 금지하는 등 집요하게 이뤄진 일제의 방해로 충남청년대회 개최는 끝내 좌절되고 만다.

이에 임종만은 방향을 바꿔 충남북 일대의 사회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끄는 사상단체로 ‘제일선동맹’을 결성해 집행위원이 됐다. 제일선동맹은 월례회를 개최하고 기관지로 <제일선>을 발행하는 등 충남북을 아우르는 사상단체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렇다고 임종만이 청년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임종만은 충남청년대회가 좌절된 1925년에도 경기도청년연합회 준비위원, 경성청년연합회 조직부문 전문위원으로 활약하는 등 서울청년회를 매개로 한 청년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었다.

민족협동전선 신간회 활동

임종만은 1927년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신간회 당진지회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다. 1927년 12월6일의 결성대회에서는 임시의장을 맡아 대회를 이끌었고, 이후 1931년 해소될 때까지 간사 또는 대표위원·상무집행위원 등을 역임하며 활발히 움직였다.

신간회 당진지회는 정환석 등 천도교계와 신합청년회 간부들이 주도했는데, 임종만은 정학원·배기영과 함께 신간회 당진지회에서 사회주의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임종만은 1929년 6월에는 신간회 중앙검사위원으로 선출돼 신간회 중앙조직에서도 활동했다.

임종만이 처음부터 신간회 결성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1926년 ‘정우회 선언’을 계기로 신간회 결성이 시작될 당시 임종만이 가담한 서울청년회·전진회 등에서는 ‘조선민족의 유일지도기관’을 지향한 조선민흥회를 별도로 추진하고 있었다. 신간회와 조선민흥회의 합동이 극적으로 이뤄진 것은 신간회측에서 조선민흥회측의 합동 조건 4개항을 적극 수용한 1927년 초였다.

신간회 시절 임종만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하는 학생 시위를 촉발하려다 발각돼 고초를 치른다. 임종만은 당진지회의 고인환으로 하여금 석문공립보통학교 교사인 인학수·인운식을 통해 5학년 학생들의 서랍에 몰래 격문을 배포해 학생기념일인 1930년 1월18일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돼 실행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임종만을 비롯한 4명이 2월 말 체포됐고, 모진 고문 끝에 구속된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일경이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채 고문에 의한 자백을 근거로 재판까지 벌이면서 ‘부인 전술’을 구사한 임종만 등 4명이 체포된 지 1년 4개월 만인 1931년 6월30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일단락된다.

조선공산당 재건에 앞장서다 고문후유증으로 사망

임종만은 1932년 1월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사건으로 정학원·주윤흥 등 당진의 동지들을 포함한 전 조선의 동지들과 함께 다시 한 번 일경에 체포되고 만다.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특위에서 파견돼 조선공산당 재건활동을 하던 조선공산당재건공작위원회가 일경의 대대적 검거선풍으로 와해 위기에 놓이자 이를 재조직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공작위원회는 종래의 지식인 중심 조선공산당 활동을 비판하면서 노동자와 농민 등 기층민중 중심으로 한 아래로부터의 조직 재건을 모토로 활동한 조직이었다. 농민 출신 임종만이 이 조직에 참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모진 고문 끝에 예심에 회부된 임종만은 그해 9월 고문후유증으로 중태에 빠지자 서대문형무소에서 병보석으로 출옥한다. 곧바로 경성의전 부속병원에서 복막염과 맹장염 수술까지 받지만 4개월 만인 1933년 1월30일 끝내 사망하고 만다.

임종만이 사망한 지 8개월여 후인 같은해 10월7일, 이번에는 임종만의 평생 동지 정학원도 사망하고 만다. 고문후유증으로 역시 서대문형무소에서 중태에 빠져 병보석으로 석방된 지 불과 보름 만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임종만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1919년 3·1 운동 이래 14년의 기간 동안 한편에서는 당진이라는 지역을 활동무대로, 다른 한편에서는 전 조선을 활동무대로 종횡무진 활약하다 여러 차례 일경에 체포되면서 당한 고문후유증으로 끝내 사망에까지 이른 순국선열에 대한 적절한 예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건국포장은 독립유공자에 주는 훈장(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 가운데 여섯 번째에 해당한다. 보훈처에서 임종만의 훈격을 높이기 위한 재논의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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