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최근 기본소득이 여러 곳에서 이야기된다. 정부가 국민 모두에게, 조건 없이, 개별적으로 정해진 현금을 지급하자는 것이 기본소득 내용이다. 이런 아이디어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4차 산업혁명론’과 관련이 있다. 4차 산업혁명 주창자들은 하나같이 “인공지능 기계의 확대로 일자리가 사라질 테니 국민 존엄과 권리를 위해 임금을 대체하는 새로운 소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좌파·우파 가릴 것 없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기본소득에 대한 일반적 반론은 필요 재원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재정부담 어려움이 기본소득을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만약 국민이 이런 식으로 소득을 얻자고 합의한다면 못할 이유가 없다. 심지어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선진국에 비해 한참 낮은 편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본소득이 잘못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어서다.

첫째, 기본소득은 기술변화가 초래할 미래를 과장한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전제하는 경제변화는 실제 세계에는 없다.

인공지능 발전으로 자동화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고실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산업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기술발전은 노동을 절약(노동생산성 상승)하면서 동시에 노동을 확대(생산량 증대)해야 지속가능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이해해 보자. 기술발전으로 자동차가 마차를 대체했다. 운전기사 1인당 운송량(노동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다. 이때 운송할 화물과 사람이 마차 때보다 폭발적으로 증가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자동차 생산량은 마차 생산량보다 감소한다. 그런데 마차만큼도 판매되지 못하는 자동차는 생산에 필요한 자본을 감안하면 기업에게 큰 손해다. 기업은 자동차를 생산하지 않고 기술발전도 멈춘다.

산업혁명은 생산성과 생산량을 동시에 증가시켜야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가 19세기 이래 산업혁명이라 부르는 모든 변화가 그랬다. 생산량 증가는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감소를 상쇄한다. 최근의 기술변화가 4차 산업혁명이라면서 실업 증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난센스다. 인공지능을 통한 노동 절약이 생산 증대로 상쇄되지 않는다면 기술발전 이전에 이윤율 하락으로 경제위기가 닥친다. 인공지능도 더 발전하지 못한다.

현재의 자동화 기술이 실제로 일자리를 없애고 있는지도 실증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미세한 변화는 있지만 대량실업이라 부를 만한 조짐은 없다. 2010년대 실업은 기술 탓이 아니라 고장 난 금융세계화 탓이었다. 2010년대 기술혁신이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세계 경제학계에서 많이 논의하는 주제는 노동생산성 폭등이 아니라 노동생산성 상승의 둔화 원인이다.

둘째, 기본소득은 생산과 소득이 어떻게 연계되는지 무시한다. 경제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려면 어떤 식으로든지 생산 속에서 소득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신고전파는 소득을 생산에 대한 기여로 규정한다. 소득을 높이려면 생산에 더 기여해야 한다. 이것이 생산을 자극하는 인센티브가 된다. 케인스주의는 생산적 투자를 자극하기 위한 소득을 이야기한다. 생산의 주체인 기업이 위험한 설비투자에 나서야 경제가 성장하는데, 정부는 기업이 설비투자 외 딴짓을 못하게 금융소득을 규제해야 하고, 재정을 이용해 직접 투자에도 나설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이윤율 동역학을 통해 생산과 소득의 모순을 분석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이윤은 착취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고용을 유발하는 기업 투자는 이 착취가 원천이다. 착취가 줄면 투자가 줄고, 고용이 줄면서, 노동자 소득이 감소한다. 소득을 얻기 위해 착취를 수용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이런 이론을 전제로 신고전파는 생산성에 비례하는 소득을, 케인스주의는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소득을, 마르크스주의는 임금소득 모순을 혁파할 자본주의적 생산의 변혁을 주장한다.

그런데 기본소득에는 이러한 생산이론이 없다. 오직 분배만 본다. 이는 복지이론에도 미달하는 것이다. 복지이론들은 노동시장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임금(사회보장지출에서 사회보장세입을 공제한 것) 제도를 설계한다. 독일처럼 낮은 시장임금과 높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고, 스웨덴처럼 높은 시장임금과 낮은 사회임금을 채택할 수도 있다. 기본소득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현금을 나눠 주는 것이다. 분배의 대상과 방법만 있지 시쳇말로 “소는 누가 키우냐?”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한 분배이론이다.

셋째, 기본소득은 탈노동에서 자유를 찾는다. 이런 자유로는 현대 사회가 처한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현대 사회의 이상은 자유·평등·풍요를 확대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구속·불평등·빈곤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향한다. 현대의 지배적 이념이었던 자유주의는 자유를 재산소유로, 평등을 기회의 균등으로, 풍요를 시장의 효율로 달성하려 했다. 사회주의는 자유주의가 부르주아의 자유만 확대한다고 비판하며, 다수가 자유·평등·풍요를 누리려면 생산수단 사적소유와 임금노동제 철폐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현대 이념의 특징은 개인적 권리와 사회집단의 경제를 함께 사고한다는 것이다. 사회집단의 경제란 거대한 사회적 분업을 조직하고 확대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분업은 개인들이 생산에 참여해 만드는 거대한 상호관계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분업 속에 이뤄지는 개개인의 노력을 ‘노동’이라 부른다.

경제 없는 개인적 존엄을 따질 수 있다면 탈노동이 맞을 수도 있겠다. 이런 존엄은 종교 아니면 현대 이전에나 통할 이야기다. 탈노동은 곧 경제 없는 사회, 집단 없는 개인의 존엄일 뿐이다. 포스트모던하다기보다 오히려 프리모던한 이야기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현대 이념들이 곤경에 처했다고 탈노동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리해 보자. 기본소득은 상상 속 4차 산업혁명의 구빈법이다. 더불어 사회변화를 생산이 아니라 소득분배에서 찾는 딜레마에 빠진다. 우리는 현대의 이상인 자유·평등·풍요를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을 생산의 변혁에서 찾아야 한다.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야 문제를 풀 수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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