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당선되며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얼마 전 11월13일 전태일 열사 기일에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모두가 공정한 사회로 열사의 뜻을 계승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불과 5일 뒤에 고용노동부는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를 사실상 파괴하는 개악정책을 발표했다.

크게 두 가지다. 첫째 50명 이상 300명 미만의 노동자를 사용하는 사업(장)에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을 위반해도 사용주를 처벌하지 않고 ‘계도기간’을 주겠다는 것, 둘째 ‘일시적인 업무량 급증 등 경영상 사유’에 대해서도 근로기준법상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우리 법률에는 계도기간이나 처벌유예 근거규정이 없다. 노동부 장관은 직권을 남용했다. 삼권분립 원칙을 무시하고 국회 입법을 우습게 여기고 있다. 시행일을 명기해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의 시행을 일개 장관이 막겠다는 게다. 막을 권한이 없고 막을 수도 없다. 그리고 막으려는 행위 자체에 대해 장관은 엄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처벌조항이 있음에도 집행하지 않는 공무원의 행위는 직무유기죄에 해당한다. 노동부 장관이 공개적으로 직무유기죄를 범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했다. 정부 눈에 노동자는 보이지도 않고 사업주만 걱정되고 두렵다는 것이다.

특별연장근로의 경우 근로기준법 53조4항과 시행규칙에서 요건을 엄격히 해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한다. “자연재해,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에 따른 재난 또는 이에 준하는 사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도 없이 노동부 장관의 단독권한으로 ‘일시적인 업무량 급증 등 경영상 사유’라는 두루뭉술하기 짝이 없는 요건만으로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겠다는 심각한 개악안을 발표했다. 대단히 오만한 행위다.

헌법 32조3항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고 한다. 이번 노동부 발표에 대한 정무적 찬반은 별론으로 하고, 그 내용 자체가 근로조건 개악임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헌법에 반하는 정책임은 분명한 것이다.

근로기준법 94조에서는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할 때는 노동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 또는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의무적으로 얻도록 하고 있다. 이 동의가 없으면 취업규칙의 불이익한 변경은 무효다. 이는 헌법 32조3항을 확실하게 실현하기 위해 국회가 만든 법률이다. 그런데 노동부는 국민 모두에게 적용되는 근로조건 정책을 불이익하게 변경하면서 노동자인 국민 누구의 동의도 구하지 않았다. 동의는커녕 협의도 없었다. 국회가 만든 근로기준법을 무너뜨리면서 국회를 '패싱'했다.

노동부 장관은 직권남용 형사처벌이나 행정소송 및 헌법소원 제기를 당할 위험천만한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 당연히 청와대 재가가 있었을 테니 가능했을 행태다. 선을 넘어도 너무 많이 넘었다.

지금 상황에서 재계의 반발이 커서 임시로 그렇게 한다는 취지로 설명하지만 이런 논리는 노동자들에게 너무 익숙하다. 반응도 마찬가지다. ‘그럼 그렇지. 더불어민주당이 하는 일이 그렇지.’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을 만들었다. 잠깐 힘들면 되니까 좀 참자고 했다. 그런데 비정규직 제도는 완전히 고착돼 한국은 세계에서 양극화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당선 전과 집권 초기에는 파견법과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을 개정하겠다고 했으나 아무것도 한 게 없다. 소수 야당 의원이 제출한 개정안은 거대 양당 권력투쟁에 밀려 국회에서 전혀 논의가 안 되고 있다. 최저임금 1만원 정책은 산입범위를 개악해서 실제 인상효과를 없애 버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맥시코를 제외하고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자 주 52시간 노동시간 상한제라도 확실하게 하려는 줄 알았더니, 결국 재계의 로비 앞에 굴복하는 모습을 또 보여 주고 있다. 굴복이 아니라 노동자들 눈치를 보다가 원래 제자리를 찾아간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 그렇지. 더불어민주당이 하는 일이 그렇지.’ 노동자의 냉소가 하늘을 뚫는다. 분노가 아니라 냉소만 가득하다. 집권여당과 보수야당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낳은 제1의 생산물은 반노동 정책이다. 기업가들 입이 귀에 걸린다.

지난 19일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스쿨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민식이 이야기가 이슈가 되자 이틀 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는 법안심사소위에서 ‘민식이법’을 통과시켰다. 10분 정도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피해아동 관련 법인 하준이법, 해인이법, 한음이법, 태호·유찬이법은 통과되지 않았다. 이슈가 되는 일만, 욕먹지 않을 만큼만 하고 있는 국회의 모습이다. 노동자들은 이제 무얼 더 해야, 얼마만큼 더 과로사를 해야 정부와 국회가 일을 할까. 맥시코도 누르고 전 세계 최장 노동시간 국가가 돼야 할까?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