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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국적 기업의 책임
▲ 박제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세계화는 기본적으로 일국적 법제에 근거하고 있던 제3자 보증인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기업은 이미 국경을 넘어 초국적화되고 있는데, 기업 활동을 규제하는 제3자 보증인은 여전히 국경선 안에 갇혀 있다. 그리고 국제적 차원에서 초국적 기업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세계정부 같은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도 없고 규제도 없는 상황이 기업들에게 결코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초국적 기업들은 이해하고 있으며, 국제적 차원에서 제3자 보증인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서 스스로 국제적 제3자 보증인을 자처하고 나선다. 미국의 석유 재벌인 록펠러 가문의 3대 당주인 데이비드 록펠러(1915~2017)는 20년 전에 이미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최근 몇 년간 세계 여러 지역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확산됐다. 그 결과 정부의 역할은 줄어들었고, 이것은 기업인에겐 유리한 상황이다. 그러나 반면에 누군가 정부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는데, 나는 기업이 그 일을 맡는 것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논리적으로 볼 때 기업이 정부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목적이 이해관계자 중의 일부인 주주의 이익에만 봉사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요청에 화답하기라도 하듯이, 미국 거대 기업들의 로비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은 2019년 8월19일에 ‘기업의 목적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기존 주주자본주의적 관점, 즉 기업의 존재 이유는 주주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는 관점은 현재의 기업 활동을 정확하게 묘사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한다. 이들은 성명에서 “우리의 이해관계자 각각은 모두 필수적”이라며 소비자와 종업원, 공급업체와 지역공동체, 그리고 주주와 공유하는 “기본약속”을 제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최근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개념들, 예를 들면 “실천점검의무”(기업 활동에서 인권 침해적인 요소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하는 실천들을 계획하고 이를 점검해야 할 의무), “기업의 사회적 책임” 또는 “ISO 26000”, 또는 미국의 “공익기업”(기업의 목적을 주주의 이익으로만 한정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업 정관에 공익의 실현을 경영 목적의 하나로 정해 두는 기업)이나 프랑스의 “기업 목적의 공익성”(2019년 개정된 프랑스 민법전 1833조. “회사는 사회적 이익을 위해 경영돼야 하며 회사 영업이 초래할 수 있는 사회적·환경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등의 개념은 모두 초국적 기업이 국제규범 질서의 보증인으로 나서거나 내세우고자 하는 기획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형 초국적 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삼성전자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책임지는 노동정책”이라는 제목 아래 아동근로금지 정책, 이주근로자 가이드라인, 실습생 보호 정책, 고충처리 가이드라인, 여성건강증진 프로젝트, 기초경제 교육 및 RBA(Responsible Business Alliance) 노동인권 심사원 양성 등의 주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각종 언론 보도에서 보듯이 삼성이 동남아시아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책임지는 노동정책”과 거리가 먼 것 같다.

노동·환경·조세에 관한 영업지의 법령을 준수하지 않으면서 초국적 기업들이 스스로 제정한 국제 행동규범을 준수하는 것으로 책임의 의미가 충족됐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국적 기업에 실질적인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을 위반해 생산된 상품에 대해서는 생산과 수입과 판매를 금지하는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 이것은 상품 자체의 하자가 아니라 상품의 생산조건에서 발생한 하자를 문제 삼아 상품의 이동을 규제하는 것인데, 이미 지적재산권 영역에서 활용하는 방법이다. 지적재산권법에서는 불법 복제물 자체의 하자가 아니라 불법 복제물이 지적재산권을 위반해 생산됐다는 사실 그 자체를 문제 삼아 생산과 유통과 판매를 금지한다. 노동법을 위반해 생산된 상품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관철할 수 있는 국제적 차원의 제3자 보증인, 예를 들면 국제형사법원에 비근한 국제노동법원의 설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jeseongpark@kli.re.kr)

박제성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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