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해성 공인노무사(플랜트건설노조 정책국장)

13일이면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산화한 지 49주기가 된다. 민주노총은 지난 주말 전태일 열사 정신을 기리는 전국노동자대회를 여의도에서 진행했다. 서울 마포대교 남단부터 여의대로를 10만 노동자가 가득 메웠다. 이날 모인 노동자들은 ‘100만의 전태일’이라는 슬로건 아래 △노동법 개악 분쇄 △노동기본권 쟁취 △비정규직 철폐 △사회공공성 강화 △재벌체제 개혁을 요구했다. 그리고 정부와 국회가 노동개악을 계속 추진할 경우 11월30일 전체 민중이 함께 총파업·총력투쟁에 나서겠다고 선포했다.

이렇게 모인 노동자들을 보고 사람들은 우려를 나타낸다. 그들은 전태일이 살던 시대와 달라졌다고 말한다. 어린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 주고 나면 버스비가 없어 집으로 걸어가다 통행금지에 걸려 유치장에서 잠을 청하던 전태일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한다. 전태일에 비해 지금 거리와 고공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이기적이라고 치부한다. 과연 그럴까?

49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들은 여전히 일을 하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죽어 간다. 한 해 평균 2천400여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다. 고 김용균씨의 부모님과 동료들이 치열하게 싸워 산업안전보건법을 간신히 개정해 놓았더니 그 변화를 무력화하는 시행령을 국무회의에서 간단히 통과시켜 버린 것이 문재인 정부였다.

그런 정부와 집권여당이 추진하는 노동 관련 법안이 심상치 않다. 세계적인 경기침체 영향 속에 일자리와 경제성장률에 빨간불이 켜지자 그들은 재벌들에게 달려갔다. 재벌들은 950조원이라는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쌓아 놓고 정치권을 조종하고 있다. 그들이 축적한 그 금액이 실은 노동의 결과임에도 재벌그룹 총수 일가는 마치 자신들의 것처럼 선심 쓰듯이 투자를 운운한다. 20대 국회는 한국경총과 전경련이 내놓은 민원을 처리하기 위한 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대회를 국회 앞으로 잡은 이유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늘려 주 52시간제를 원점 이하로 돌리려 한다. 산업재해 인정기준에서 주 60시간 이상 노동을 과로사 판단기준으로 두고 있는데도, 입법안에 따르면 연장근로수당도 없이 주 68시간 노동을 6개월 동안 시킬 수 있다. 과로사를 입법하는 셈이다. 원수처럼 싸우던 여야는 재벌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것에 있어서는 구분이 가지 않는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기본협약)을 비준하라는 것은 노동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심지어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2월 "한국이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제재를 시사했다. 올해 4월 한국노동연구원도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계속 미룰 경우 EU가 다양한 경제적 불이익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는 것은 새로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누렸어야 할 권리를 뒤늦게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벌들은 ILO 핵심협약 비준의 대가로 노동조합 활동을 제약하는 입법을 요구했다. 국회는 사용자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해 사업장 내에서의 쟁의행위 금지, 산별노조 간부의 현장출입 제한,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쟁의행위 찬반투표 유효기간 설정 등 노동조합의 단결력과 단체행동권을 대폭 축소하는 입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만들겠다던 약속은 잊힌 지 오래다. 경북 김천 한국도로공사 사옥에서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이므로 도로공사에 직접고용된 노동자"라는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고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두 달 넘게 농성을 하고 있다. 한국지엠 노동자들도 법원 판결을 이행하라며 고공에서 단식농성을 했다. 서울 강남역사거리 CCTV타워와 영남대병원 옥상에서도 고공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노동 분야에서 보여주는 일관성이 있다면 정권 재창출에 어떤 것이 득이 될 것인지에 따라 판단한다는 점이다.

혹자들은 적폐세력에게 득이 되므로 노동자들이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논리가 더 위험하다.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의 온상인 파견법 등 30여년간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노동악법은 모두 민주당 정권 시절에 만들어졌다. 민주주의는 집권당의 색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고 싶어도 직장에 매여 광장에 나올 수 없는 청년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는 시간이 갈수록 불평등이 심화하게 돼 있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개악을 막기 위해 총파업을 결의했다. 쉽지 않은 것을 안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에서 막지 못했던 법 개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고공에서 보내야 했던가를 기억해야 한다. 노동자들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노동법이 왜 이 모양이에요?” 사용자 권리를 보장하는 노동법 내용에 실망할 때 나오는 말이다. 현장에서 이겨도 큰 흐름에서는 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우리가 대충 분노하고, 형식적으로 저항할 때 재벌 민원은 경찰 차벽 안쪽에서 손쉽게 전태일의 꿈을 빼앗아 갈 것이다.

정세가 심각하지만 다행히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다. 촛불혁명 이후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힘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결집하고 있다는 점이 정권을 바꾼 것보다 더 큰 본질적인 변화다. 노동자대회 포스터에 펄럭이던 ‘100만의 전태일’이라는 글자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모든 조직된 노동자가 자신을 전태일로 만들자는 각오다. 노동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다른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나를 버리고 갈 각오를 다지자는 것이다. 이달 말 광화문사거리에서 역사를 전진시키는 거대한 전태일의 파도를 만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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