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인도네시아를 처음 가 본 것은 대략 25년쯤 전 일이었다. 환경단체에서 반핵 관련 일을 하던 때였다. 아시아 환경단체들의 회의에 참가하게 되면서 우연찮게 인도네시아 땅을 밟게 됐다. 워낙에 오래된 일이라 흐려질 대로 흐려진 기억이지만 몇 장면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카르타에서 족자카르타까지 열 시간 가까이 버스를 탔던 일, 족자카르타의 불상 가득했던 관광지 옆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셨던 일, 족자카르타 근교의 호젓했던 해변을 동네 아이들과 한바탕 뛰어다녔던 일, 특이하게 (왜곡된 기억일지도 모르지만) 수녀원 같은 곳을 숙소로 이용했던 장면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보통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하면 휴양지 발리부터 먼저 떠올리지만 내게는 인도네시아 하면 발리보다 족자카르타가 먼저 떠오른다.

발리는 아내가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본 뒤 꼭 한 번 가 보자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줄리아 로버츠가 이탈리아에서 먹고, 인도에서 기도하고, 발리(특히 우붓)에서 사랑하는 그 영화에 나온 발리는 말 그대로 평안하고 사랑스러운 동네였다. 우리 가족의 발리 여행이 ‘우붓’에서 시작된 것도 어느 정도는 영화 때문이기도 하다.

발리를 여행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제법 큰 섬인지라 동네마다 즐기는 방법이 조금은 다르기 때문이다. 우선 ‘우붓’은 숲속에서 한껏 피톤치드를 마시며 설렁설렁 지내는 게 딱이다. 하루 정도만 시간을 내서 주변의 특색 있는 사원과 계단식 논인 ‘트갈랄랑’ 정도를 보는 것으로 관광은 충분하고, 나머지 시간은 요가를 하든, 카페에서 죽치고 앉아 있든, 음식 만들기 수업에 참가하든 설렁거리면 된다. 바쁘게 움직이는 건 우붓과는 살짝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매일 밤 우붓 왕궁 마당에서 열리는 전통춤 공연을 보면서 맥주 한잔하는 것도 빼먹으면 안 될 코스 중 하나다.

발리 여행 혹은 관광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스미냑과 쿠타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놀아 볼 수 있다. 사실 이 두 동네는 젊은 동네다. 스미냑은 발리의 가로수길이라고들 하는데, 부티크한 풀빌라, 맛집 카페, 쇼핑하기 좋은 가게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거기에 해변을 낀 클럽들이 저마다 청춘들을 꼬드기느라 바쁜 동네다. 그러니까 스미냑에서는 ‘인싸’처럼 놀고먹고 사진 찍으며 지내는 게 정석인 셈이다. 스미냑 아래쪽에 있는 쿠타는 발리의 전통적인 관광 중심지다. 포피스 거리 같은 오래된 여행자 거리에는 음식점과 값싼 숙소, 역시 값싼 기념품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쿠타에서는 ‘서핑’이 진리다. 쿠타 해변의 파도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이곳이 왜 서퍼들의 성지라 불릴 만한지 금세 끄덕거릴 수 있다. 반나절 정도 서핑 수업을 받으며 파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보는 것이 쿠타 여행의 참맛이다.

스미냑과 쿠타가 발리섬에서 서쪽 아래에 있다면 누사두아는 동쪽 아래쪽에 있는 해변 동네다. 쿠타의 거친 파도와는 180도 다른 얌전한 파도가 오가는 누사두아 해변은 전형적인 휴양지 풍이다. 그래서인지 고급 리조트 체인들이 해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에서는 할 게 별로 없다. 그저 리조트에서 콕 박혀서 수영장을 헤집고 다니거나, 리조트에서 내주는 음식에 사육당하다가 해가 지면 슬슬 밖으로 나와 열기가 가신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일 뿐. 해변을 따라 마련된 노천 카페와 푸드코너들 때문에 빈속일 걱정은 거의 없다.

발리를 즐기는 또 하나의 방법은 바로 화산 투어, 혹은 화산 트레킹이다. 수시로 폭발해 대는 아궁화산은 가 보기 쉽지 않지만, 그 옆에 자리 잡은 바투르화산은 일출 트레킹으로 유명하다. 새벽에 길을 나서 두세 시간 걸어 꼭대기까지 올라가 일출을 보는 트레킹이다. 바투르화산 앞쪽으로 백두산 천지처럼 펼쳐진 칼데라호를 앞에 두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끝내 준다는 얘기가 있다(내 경우는 지독한 게으름과 못지않게 게으른 가족들 덕에 대낮에, 살짝 밋밋하게 본 게 전부지만). 폭발할 듯 살아 있는 화산이 못내 아쉽다면, 바투르화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발리섬에서 배를 타고 자바섬으로 건너가 이젠화산까지 가는 트레킹 투어에 도전해 보는 거다. 새벽 1시부터 3시간 정도 올라 화산 정상에서 푸른 불꽃(블루 파이어)을 보는 것이 이젠화산 트레킹의 진수라고 한다. 마녀들이 썼을 법한 매력적인 푸른 불꽃이라니! 상상만 해도 몸이 꿈틀거린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유황 냄새를 맡아 보는 게 두 번째 하이라이트란다(물론 방독면은 쓴 채로). 이번 여행에서는 놓쳤지만, 다시 한 번 기회가 온다면 화산 트레킹 투어는 꼭 참가해 볼 생각이다.

사실 어느 여행지나 마찬가지겠지만, 여행은 자기에게 맞는 색깔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겠지만, 조금 무섭고, 꺼려지더라도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가 보면, 낯설어 보였던 색깔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 여행의 매력이 바로 그런 낯선 발견 아닐까?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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