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민 청년유니온 사무처장

어느덧 11월이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1년 앞두고, 전태일기념관에서 청년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제안받아 1일 저녁에 이야기를 하게 됐다. 50년. 반세기 전의 한 죽음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지금 2019년에 전태일은 무엇을 고민할까?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외친 지 50년이 다 됐지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권리를 이야기하고 싸워 가는 것은 여전히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1970년의 한국 사회와 지금의 한국 사회는 완전히 다른 세상인 것은 분명하다.

경제성장률은 10%에서 2.7%로, 합계출산율은 4.53명에서 0.98명으로,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은 38%에서 53%가 됐다. 숫자로만 봐도 한국 경제가 고도성장을 막 시작한 시점과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저성장과 저출산은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추세고, 가부장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빠르게 무너져 가고 있다. 서비스업 비중 확대와 정보통신기술과 결합한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등장하고, 단순히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의 틀만으로는 한국 사회의 노동 문제를 논의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지휘·감독에 대한 판단도 어려워지고, 노동 과정은 더욱 잘게 쪼개지거나 이를 작동하는 방식도 고도화되고 있다.

300달러도 안됐던 국민소득이 3만달러가 됐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모두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노동의 희생을 통한 경제성장 속에서 모두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과거와는 당연히 다르지만, 경제성장의 과실이 편중되게 돌아가다 보니 한국 사회 불평등은 세계적인 수준이 돼 버렸다. 상위 10%가 전체 자산의 66%를 소유하고, 전체 소득의 43%를 차지한다. 특히 과거와 달리 자산의 소유와 그로 인한 생애 전반에 걸친 세습은 상대적으로 일반적이 됐다. 자산의 소유는 수도권과 지방, 서울과 비서울, 강남과 비강남이라는 지역별 격차와 닿아 있고, 교육을 매개로 노동시장의 지위로 세습되기 시작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탈산업화, 저성장과 함께 이뤄지는 일자리 감소 등과 겹치면서 청년실업으로 대표되는 노동시장 신규진입자로서의 청년이 겪는 노동 문제가 등장했다.

과거에는 교육, 그리고 그를 통해 얻게 되는 노동시장에서의 지위는 한국 사회에서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져 왔으나, 이제는 교육과 노동이 오히려 불평등을 유지하는 매개가 되고 있다. 사회 전반의 불평등이 청년세대를 덮치고 있다.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투입할 수 있는 자원에서 격차가 발생하고, 이는 취업 과정에서 노동시장에 어떤 지위로 진입할 수 있는지 결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첫 직장의 지위가 보통 평생을 결정한다.

처음 출발점이 이후 위치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 혹은 결정하는 것에 많은 청년들이 좌절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아마 전태일이 여공들에게 풀빵을 사다 주고, 그들의 노동조건에 깊은 문제인식을 느꼈듯이 2019년의 전태일이라면 청년들이 처한 불평등을 완화·해소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2019년 청년노동운동이 출발해야 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이러한 문제 상황에 비해서 청년노동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회적 공간은 대단히 협소하다. 커다란 공장이 아니라 작은 사무실과 매장에 흩어져 있는 청년들이 개별기업 단위로 조직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노동운동의 핵심적 역할은 조직화가 사실상 불가능한 청년들을 묶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회적인 싸움을 해서 현실을 바꾸는 것에 더욱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상징과 의미를 부여하느냐,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사회적 영향력을 어떻게 강화하느냐 하는 대단히 정치적 과정일 것이다.

최근 사태를 거치면서 다시금 청년의 이야기가 화두에 오르고 있다. 물론 아직 그 어디에도 청년을 소비할 뿐,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양극단으로 치닫는 정치와 사회 속에서 대다수 청년이 느끼는 것은 찝찝함이다. 이 찝찝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평등 해소에 대한 대안과 전략을 주도적으로 내놓아야 한다. 이를 통해서 사회적 지지와 공감대를 더욱 넓혀 나가야만 한다. 이것이 전태일 열사가 그토록 바꾸고자 했던 문제들을 바꿔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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