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한국 조선산업의 허리가 꺾이고 있다. 성동조선해양·STX조선해양·대한조선·한진중공업 같은 중형 조선소 얘기다. 10년 전만 해도 20여곳이던 중형 조선소 숫자는 지금 한 자릿수로 쪼그라들었다.

남아 있는 조선소들도 허덕이긴 매한가지다. 성동조선해양은 연말까지 매각이 성사되지 않으면 청산을 면하기 힘들고, STX조선해양은 고강도 자구책을 이행하고 있지만 현금 유동성이 확보되지 않아 수주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형 조선소가 무너지면 한국 조선업 생태계가 흔들린다는 업계·학계의 경고가 수년 전부터 이어졌지만, 정부와 국책금융기관들은 단기 손실을 회피하려 지원보다는 구조조정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비판이 높다.

성동조선 매각 성사 최소 조건 "RG 발급 확약"

31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성동조선·STX조선 이대로 둘 것인가?' 토론회에서는 매각과 청산 기로에 서 있는 성동조선해양과 회사 정상화 문턱 앞에서 유동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STX조선해양에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쏟아졌다. 토론회는 금속노조·조선업종노조연대·여영국 정의당 의원·김종훈 민중당 의원이 공동주최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곳은 4차 매각에 나선 성동조선해양이다. 올해 12월31일까지 본계약을 체결하지 못하면 청산절차를 밟게 된다. 전문가들은 선수금 환급보증(RG)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RG는 조선업체가 선박을 제때 건조하지 못하거나 파산했을 경우 선주에게 받은 선수금을 은행이 대신 물어 주겠다고 약정하는 보증제도다. 조선업체는 은행에서 RG를 발급받아야 선박건조를 시작할 수 있다.

강기성 노조 성동조선해양지회장은 "매각 성사의 필수조건은 '성동조선을 인수하면 RG 발급은 반드시 해 주겠다'는 국책은행의 확답"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종식 창원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중소 조선소들은 극심한 수주 가뭄을 버티기 위해 손실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낮은 가격에라도 선박 수주를 해야 한다"며 "하지만 은행들은 배 1척당 1% 이상 수익을 보장하지 못하는 수주건에는 RG 발급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박 연구원은 "조선소 운영을 위해서 적자 수주만 아니라면 이윤이 거의 없더라도 RG 발급을 해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미경 단국대 교수(국제통상학)도 "지난 10년간 RG를 꾸준히 받은 대선조선은 2천억~4천억원의 매출을 달성한 반면, RG를 받지 못한 중견·중소 조선소들은 폐업했다"며 "중견·중소 조선소가 경상남도 일자리 창출의 주력산업임을 감안하면 성동조선 매각 과정에 RG 문제는 해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원도 안 하고, 경쟁력 떨어진다?"

윤종우 노조 STX조선지회 조사통계부장은 "선박건조 대금이 에스크로계좌(조건부 날인증서)로 묶여 있어 현금 유동성 확보가 어렵다"며 정부의 정책적 지원을 주문했다. 예컨대 수주 선박에 대한 건조자금이 일부 부족할 경우 시중은행이 선박 건조 후 인도할 때 선주에게 받는 약 60%의 선박대금을 담보로 대출을 해 달라는 것이다.

실제 중국은 자국 조선소에서 선박건조시 외국 선주를 대상으로 초저리 신용대출과 금융지원을 하고 있고, 일본은 국책은행을 통해 각종 수출금융상품과 융자를 지원하고 있다.

윤종우 부장은 "정부 지원을 받으며 중국·일본 조선소가 한국 조선산업을 위협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지원책 하나 없이 중국·일본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어처구니없는 말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심상목 부경대 교수(조선해양시스템공학)는 "정부는 중소형 조선소별로 선종을 특화해 고유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고, 일부 브로커에게만 영업정보를 의존하고 있는 한계를 넘을 수 있도록 공동 해외영업망 구축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종식 연구원은 "개별 조선업체 차원에서 실익을 따지며 문제에 접근하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는 게 일차적"이라며 "조선산업 노사가 함께 중장기적인 발전전략 논의를 시작해야 하지만, 이에 앞서 사라져 가는 중형 조선업체에 호흡기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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