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노사합의는 반드시 이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요배달 거부를 포함해 12월 파업에 나설 것이다. 파업의 불씨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진짜 적폐는 기획재정부다.” 이동호 우정노조 위원장이 지난 25일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이다.

다들 기억하겠지만 지난 7월 한여름, 우정노조는 파업을 결의했다. 동료 조합원이 과로와 사고로 죽어 나가는 현실을 더는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정노조의 주장은 많은 시민과 노동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파업을 하루 앞두고 우정사업본부와 정부는 극적인 합의에 도달했다. 집배원 증원, 농어촌지역 토요택배 폐지를 포함한 모든 조합원들에게 주 5일 근무제 시행, 노동시간단축을 통한 업무경감 등이 합의 내용이다. 핵심쟁점이었던 집배원 증원에 대해 정부는 988명의 증원을 약속했다. 정말 턱없이 모자란 조건이었지만 시민과 노동자들의 편의를 위해 노조가 대승적 결단을 한 것이다.

그러나 4개월 가까이 시간이 지나 겨울 입구에 선 오늘 노사가 한 약속은 간데없다.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을 것이다. 과연 누가 약속 이행의 책임자인지 알 길이 없다. 충원된 집배인력은 위탁배달원 120명과 퇴직자 직종 전환자 100명 등 220명에 불과하다. 겨우 2개월 남은 올해 안에 과연 나머지 768명이 충원될 수 있을까. 정부를 도저히 신뢰할 수 없다. “인력 증원 숫자만 약속했지, 인력 증원에 필요한 예산은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며 이동호 위원장은 정부, 특히 기재부를 ‘적폐’로 부르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위탁집배원들을 위한 차량 배치에도 최소 3개월이 필요하다고 한다. 때문에 12월까지 증원한다는 약속은 지켜지기 어렵다는 게 우정노조의 판단이다.

게다가 조합원들을 더 힘들고 화나게 하는 부분은 우정사업본부의 상시적인 임금체불이다. ‘집배보로금’을 들어 본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보로금은 집배업무 종사자들의 사기진작 차원에서 1993년부터 지급해 왔다. 우편배달 지역의 규모별로 개인당 월 8만~12만5천원을 지급한다. 그 실질은 말 그대로 저임금에 시달리는 집배노동자들을 위한 임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촛불정부가 출범하던 지난 2017년부터 우정사업본부는 위 보로금을 체불해 왔다. 2017년 13억원, 2018년 33억원을 지급하지 않았고 올해는 76억원이 체불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가, 그것도 촛불정부가 공무원 노동자들의 임금을 체불하다니. 기재부는 “임금이 아니다. 근거가 없다”고 변명한다. 임금 개념을 알기나 하고 하는 주장인지 모를 일이다. 26년 동안 시행돼 온 보로금 제도의 근거를 지금 와서 찾는다는 게 정부로서 할 말인지. 무엇보다 위 보로금의 재원도 조합원들이 직접 올린 수익이다. 기재부는 그저 승인만 하면 그만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을 터다.

약속은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초등학생도 다 알고 있는 당연명제가 아닌가. 그런데 정부는 약속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지난 7월8일 우정사업본부 노사 합의만 하더라도 그렇다. 약속을 저버린 3개월 동안 안타깝게도 네 분의 조합원이 순직했다. 신속하게 약속을 이행했더라면 지킬 수 있는 목숨이었다. 도대체 어찌하란 말인가. 정부조차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최근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주요한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 있다. 노사관계의 시작과 끝은 신뢰가 아니겠나. 정부도 사측도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합의를 남발하고 이행에는 관심이 없다면 절대로 깊은 신뢰가 쌓일 수 없다.

택시산업 노사정 합의를 보자. 여러 평가가 있지만 지금으로선 깨졌다. ‘타다’ 같은 대규모 플랫폼 자본은 합의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무려 1만대 증차를 발표한다. 택시운송 노동자들은 황당하고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다. 자본을 앞세운 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기는 지경이 아닌가. ‘플랫폼·AI·빅데이터’라는 포장이 어찌 노동자들의 생존권에 앞설 수 있단 말인가. 공교롭게도 타다 대표자가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여객자동차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지경에 처했지만, 약속을 깬 까닭이 커 보인다.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정책의 문제도 당초 한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약속을 지켜 나가는 게 우선이고 그 과정에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나가는 게 순서가 아니겠나. 정부로서는 약속이 잘 이행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기본 책무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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