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재훈 여행작가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기차여서 그랬을까? 몇 년 전 누군가에게서 우디 앨런의 수다스러운 영화 중에서 괜찮다는 얘기를 얻어듣고서는 인터넷을 뒤져 본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어쩌면 지금 스페인을 여행하게 된 첫 마음을 가지게 된 것도 이 영화 덕분이랄 수 있다.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양성애의 애틋함을 다룬 영화인가 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우디 앨런 감독의 유럽 도시 투어 연작 중 하나로 원제는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국내 개봉은, 모르긴 해도 제목 하나로 말아먹었을 게 분명하다. 내게는 이 영화가 스페인, 그리고 무엇보다 바르셀로나라는 도시에 대한 동경을 심어 준 인연이 있다. 선천적 바람둥이 하비에르 바르뎀, 그의 신경증 아내 페넬로페 크루즈, 그리고 바람둥이한테 딱 걸린 여행객 크리스티나 역의 스칼렛 요한슨이 만들어 가는 삼각방정식도 맛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바르셀로나다. 구엘 공원과 몬주익 언덕, 바르셀로네타 해변에다 주변의 멋진 섬까지. 이 영화를 보고도 바르셀로나를 꿈꾸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도 큰 재주로 인정해 줄 수 있다. 바로 그 도시 바르셀로나로 지금 들어가고 있다. 차창 밖으로 번져 오는 지중해의 일출과 마주하며.

바르셀로나에 왔다면 가우디 꼬리 밟기 관광을 피할 길은 없다. 가장 북쪽에 있는 구엘 공원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바르셀로나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언덕 중턱, 전망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00년 전 이런 땅을 찜해서 전원주택 단지를 만들려고 했다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사업가 구엘의 사업 감각을 엿볼 수 있는 구석이다. 사업가와 예술가가 이렇게만 만나면 서로 천박해지지 않을 수 있으련만. 갑질에 익숙해진 우리네 거시기들에게는 가능한 일이려나? 구엘 공원은 모두가 알다시피 자연과 타일이 전부다. 회오리치는 기둥이며, 물을 뱉어 내는 배수로의 짐승 대가리, 물론 그 유명한 계단 위 도마뱀까지. 곳곳에 자연을 닮은 조형물들이 눈길을 끈다. 타일이야말로 자연스러움 그 자체다. 망치로 대충 깨뜨려 이어 붙인 듯한 타일 조각들이 이렇게 멋스러운 색을 내고, 문양을 이루는 게 신기할 정도다. 이래서 가우디, 가우디 하는구나 싶다.

구엘 공원에서 반나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그란비아 거리로 옮겨 가면 좋을 듯하다. 버스나 지하철로 10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그란비아 거리에는 가우디의 또 다른 대표작 카사밀라와 카사바트요가 있다. 두 건물 앞에는 저마다 사진기와 스마트폰을 든 구경꾼들이 앞을 채우고 있다. 안에 들어가려고 줄을 서 있는 게 아니라 밖에서만 눈요기하려는 이들이다. 두 건물의 입장료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나로서도 선뜻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2만원 가까이하는 입장료라니…. 하아~.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갔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가우디가 남긴 유작이자 현재 진행형인 탈지구적 건축물. 그간 수많은 안내서와 여행 프로그램을 통해 마주한 탓에 생각보다 익숙한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하는 한줄기 염려를 가지고 아침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런 염려는 성당 안으로 한 걸음, 딱 한걸음 들어선 순간 저절로 나온 탄성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성당 입구에서는 싱싱한 나뭇잎과 그 속에 숨은 곤충들로 가득 찬 초록문이 방문객을 맞아 준다. 마치 생명의 숲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이. 문 안으로 몇 걸음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바깥세상을 잊게 된다. 맞은편 창문들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한 몸에 받고 나면 우리는 이제 다른 세계, 아니 어쩌면 다른 생명체의 몸 안으로 들어온 느낌에 사로잡힌다. 시선을 어느 쪽으로 돌려도 가우디가 설계한 빛과 색의 경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마치 거대한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끝없이 가지를 뻗으며 주기둥들이 솟아 있다. 성당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수천 년을 소리 없이 자랐을 것만 같은 이 돌나무 사이를 헤매며 숲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느끼게끔 설계된 듯하다. 이제 시선은 자연스럽게 기둥을 타고 오른다. 마침내 시선이 닿은 천장에서는 배를 드러낸 채 매달려 있는 거대한 갑각류를 볼 수 있다. 압도적이다. 제단이 차려진 정면에는 커다란 우산(?) 아래 공중에 매달린 예수가 보인다. 예수는 지금 부활을 위해 승천하는 중이다. 천장에 뚫린 구멍이 마치 블랙홀처럼 예수를 하느님의 세계로 빨아들이고 있는 형상이다. 매달린 예수님의 등 뒤에서 때마침 파이프 오르간이 둥글고 큰 공명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자 성당 안의 신비스러움은 최고조에 이른다. 한참 동안을 자리에 앉아 성당을 느낀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공사장에서 퍼지는 망치 소리조차 예사롭지 않다. 다른 대성당들에서 보여주는 황금빛 찬란한 장식과 예수와 성경을 묘사한 거대한 조각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경외감이 몸속을 파고든다. 한동안 놓았던 정신을 주섬주섬 챙겨 다시 밖으로 나와 그제서야 급한 마음에 보지 못했던 성당의 겉모습을 보기 시작한다.

가우디는 천재 그 이상의 무엇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가우디를 품은 바르셀로나의 사람 보는 눈 역시 천재적이랄 수밖에.

여행작가 (ecocj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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