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2003년 10월26일이었다. 처음으로 전국의 비정규 노동자들이 모여서 전국비정규대회를 열던 그날, ‘비정규직 철폐연대가’가 발표됐고 집회 참석자들은 그 노래를 함께 배우고 있었다. 갑자기 대오 중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 노동자 이용석 열사의 분신이었다. 억장이 무너진 우리는 울면서 거리로 뛰쳐나가 비정규직 철폐를 외쳤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 비정규 노동자들은 서울 영등포 근로복지공단 담장을 뛰어넘어가 항의했다. 긴 농성이 시작됐고, 이용석 열사는 끝내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효율성을 높이겠다면서 시작한 공공부문 구조조정이지만 결국은 하위직 노동자들의 대량해고로 끝을 맺었다. 그런데 그 노동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마 고위직들이 현장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누군가는 해고된 자리에서 일해야 했다. 해고된 노동자들이 임시직·계약직으로, 용역·파견·민간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일하게 됐다. 인건비가 아닌 재료비로 채용돼 잡급으로 처리되기도 했다. 그중 하나인 근로복지공단 비정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파업을 시작하던 첫날 이용석 열사는 자신의 몸을 살랐다.

이용석 열사의 분신 이후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았다. 노무현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그리고 문재인 정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 대책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사라지고 있는가?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는 신장되고 있는가? 2016년 정부 통계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무기계약직 포함 52만명이었다. 민간위탁 노동자는 이 통계에서도 제외돼 있다. 문재인 정부는 이 중 17만명이 정규직으로 전환됐다고 홍보했지만 대다수가 자회사나 무기계약직으로의 전환이다.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은 무기계약직·단시간 노동자·자회사·용역·파견·민간위탁 등 여러 고용형태로 갈라져서 위계화됐다. 업무는 분할되고 소통체계도 사라졌다.

그리고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들이 죽어 갔다. 2016년 서울지하철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군은 달려오던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시간에 쫓겨 일해야만 했던 외주업체 노동자였다. 2018년 서부발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던 김용균은 안전장치 없는 깜깜한 컨베이어를 홀로 점검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 죽음들은 유가족과 동료들이 나서서 투쟁하지 않았다면 다른 죽음과 마찬가지로 ‘작업자 과실’로 남았을 것이다. 2017년 폭우 속에서 재해복구를 위해 일하던 노동자가 쓰러져 숨졌다. 그러나 정부는 순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노조가 나선 뒤에야 순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살아서 위험에 내몰린 공공부문 비정규직들은 유가족과 동료가 싸우지 않는 한 죽어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들의 권리 찾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이용석 열사가 가졌던 열망은 공공부문 비정규 노동자들의 마음에 남아 있다. 이용석 열사는 공공부문의 업무를 충분히 성실하게 감당하고 있는 이들을 하위신분으로 만드는 차별에 맞섰다. 노동의 가치를 함부로 폄훼하는 현실에 맞섰다.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고 했다. 임금과 노동조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불의한 고용구조에 대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자고, 용기를 갖자고 말해 왔다.

그래서 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보며 이용석 열사를 떠올린다. 영업소 소장의 아침식사를 해 주고 텃밭 일을 대신하며, 성희롱을 견뎌 왔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회사로 가라고 할 때 “당신들이 강권하는 자회사는 믿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회사는 이 노동자들을 대법원 승소자와 1심 승소자, 2015년 전 입사자와 후 입자사로 갈라놓았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동료를 버릴 수 없다”는 간단한 말로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차별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가르는 것에 저항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이용석 열사의 정신을 이어 가는 이들이다.

16년이 지난 2019년 10월26일, 이용석 열사가 분신했던 종묘공원에서 열사를 기리는 동판 제막식이 열린다. 이어서 사단법인 김용균재단 출범 총회와 출범식을 갖는다. 그 16년의 세월 동안 많은 이들이 싸웠다. KTX에서, 마사회에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며 변화를 갈망했던 이들도 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 싸웠던 이들이 있다. 지금도 싸우는 이들이 있다. 이들 모두는 연결돼 있다. 이 연결의 힘이 왜곡된 공공부문의 고용구조를 바꾸고 공공성을 되찾게 할 것이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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