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1934년 <인간문제>를 연재할 당시의 강경애(동아일보).

강경애(1906~1944)는 일제강점기 하층 여성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낯선 존재다. 다만 최근에는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강경애의 작품이 실리면서 이제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리 낯선 인물이 아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대 최고의 소설가’로 평가받기도 했던 강경애가 한동안 우리에게 잊힌 존재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기숙사는 감옥이 아니다” 숭의여학교에서 맹휴를 주도하다

강경애의 삶은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불우하고 불행한 삶의 연속이었다. 삶은 시작부터 순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1906년 황해도 장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강경애는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강경애는 1921년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지만, 3학년이던 1923년 10월 기숙사 학생들이 주축이 되는 동맹휴교를 주도하다 퇴학당한다. 숭의여학교는 미국북장로회가 평양에 선교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였다. 추석을 맞아 미국인 기숙사 사감이 동료의 묘소 참배마저 “성묘라는 게 기독교 교리에 맞지 않는다”며 우상숭배로 몰아가자 평소 학교측의 지나친 통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학생들이 “기숙사는 감옥이 아니다”고 반발하며 동맹휴교로 맞섰던 것이다. 당시 숭의여학교 기숙사는 사생활 간섭이 너무 심해 ‘제2 평양감옥’으로 불릴 정도였다.

강경애를 비롯한 학생들은 ‘1. 숭의여학교를 총독부 지정학교로 하야 줄 일 2. 기숙사 규칙을 개정하야 줄 일 3. 기숙사 감독 나진경을 사임케 할 일’ 등의 요구를 담아 학교 당국에 청원서를 제출했으나, 수용되지 않자 3일 만에 동맹휴교에 돌입하게 된다. 이 동맹휴교는 조만식·길선주 등 평양지역 대표적 기독교 인사들이 중재에 나섰음에도 기숙사를 봉쇄하고 음식물 제공을 중단하는 등 학교측의 완강한 태도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 두 달 가까이 지속된 이 동맹휴교는 결국 기숙사 사감 나진경이 물러나는 대신 강경애를 비롯한 주동자 4명도 퇴학당하면서 마무리됐다.

사실 숭의여학교의 맹휴사건은 1917년에도 있었다. 이때도 교사 나진경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나진경이 교감 겸 사감을 하면서 ‘불온사상’을 가지고 있는 교사나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수시로 교장에게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고 문제제기했다. 하지만 이때는 학생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못한 채 9일 만에 맹휴가 중단됐다. 그러니까 6년 만에야 4명의 학생이 퇴학당하는 희생을 치른 끝에 문제의 ‘나진경 교사 퇴진’이라는 학생들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근우회 활동가를 거쳐 소설가의 길을 걷다

숭의여학교에서 퇴학당한 강경애는 동덕여고보에 편입해 1년간 더 공부를 하다 중퇴한 후 고향인 장연에 내려가 야학을 하고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와 그 자매단체 근우회 등에서 활동한다. 당시 황해도 장연에서는 1927년 12월 초에 신간회 장연지부가 설립됐는데, 근우회도 그 즈음에 결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강경애는 이때 근우회 장연지회 서무부장으로 맹활약하고 있었다.(“장연근우지회 야유” 1929년 6월17일 동아일보)

그런 강경애가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931년 조선일보에 독자투고 형식으로 <파금>을, 잡지 혜성에 <어머니와 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강경애는 자신이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 과정을 잡지 삼천리에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

“내가 평양 숭의여고에서 기숙사 사감을 내쫓으려고 스트라이크를 하고 퇴학당하고 그 후는 서울의 동덕여학교에 다니다가 중도에 퇴학하고 고향인 장연으로 갔지요. 우리 집의 후면은 수림이 무성한 산인데 거기에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어찌도 구슬프던지요. 나는 나무 밑에 앉아서 매미 소래를 들으면서 초목과 금수가 제각기 독특한 빛(色)을 발하고 음성을 내는데 나도 나의 독특한 개성을 발휘해 나의 존재를 빛내야겠다, 하고 거듭거듭 결심했지요. 그래서 나는 소설로…. 이렇게 생각했지요.”(<최근의 북만 정세, 동란의 간도에서(속)> 삼천리 4권 7호. 1932)

강경애의 대표작 <인간문제>

강경애의 작품활동은 결혼과 함께 남편 장하일과 1931년 간도 용정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그곳에서 강경애는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맡기도 하면서 신문이나 잡지에 소설·수필 등을 발표했다. 장편소설 <인간문제>, 중편소설 <지하촌>, 단편소설 <소금> <원고료 이백원> <어둠> 등이 강경애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강경애의 대표작은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인간문제>다. <인간문제>는 남북에서 공히 일제강점기 여성작가 작품 중 가장 뛰어난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심지어 중국 연변의 조선족 동포사회에서도 “해방 전 조선소설문학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을 충분히 체현한 기념비적 작품”(박충록, 조선문학간사, 연변교육출판사, 1987)으로 평가하고 있다.

<인간문제>를 발표하면서 남긴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강경애의 기본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인간 사회에는 늘 새로운 문제가 생기며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발전될 것입니다. 대개 인간문제라면 근본적인 문제와 지엽적인 문제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것이니 나는 이 작품에서 이 시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근본문제를 포착해 이 문제를 해결할 요소와 힘을 구비한 인간이 누구며 그 인간으로서의 갈 바를 지적하려고 노력했습니다.”(1934년 7월31일, 동아일보)

<인간문제>는 황해도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 선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읜 후 지주 덕호의 하녀로 살다가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쫓겨나 인천에 있는 대동방적공장에 취업해 노동운동에 나서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순진하기만 하던 선비가 계급의식에 눈뜨면서 고향친구이기도 한 갓난이·첫째 등과 함께 노동운동에 나서는 과정을 그렸다. 하지만 폐병에 걸려 해방 세상에 대한 꿈을 현실화하지 못한 채 끝내 “시커먼 뭉치!”로 변한 선비 이야기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보여 주는 생생한 리얼리즘 그 자체이며, 식민지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시대소설이다. 1980~1990년대 유행했던 그 많은 노동소설도 강경애의 <인간문제>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의 부끄러움이자 기쁨이다.

1930년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한 강경애, 그러나…

강경애는 일제 강점기 뛰어난 작품활동에도 불구하고, 대표적인 친일 문학인 노천명의 ‘고상한 작품’인 <사슴>이 교과서에 실리는 상황에서도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인간문제>나 만주에서 생계를 위해 소금 장수에 나선 한 여성이 겪는 고난과 그 가까이에 있는 항일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은 <소금> 등의 작품 수준이 아무리 빼어나다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분단사회라는 우리 사회의 특수한 조건에서 강경애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대표한 인물이었다는 점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김좌진(1889~1930) 장군 암살범 박상실의 배후인물로 알려진 김봉환(일명 김일성)과 내연관계였다는 소문이 더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봉환은 승려 출신의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로 김좌진 암살 사건 직후 김좌진측의 이붕해에게 살해당한 인물이다(북한의 김일성과는 동명이인이다).

하지만 김좌진 암살 사건의 실상은 그런 소문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최근 조선족 출신 작가 유순호의 심층취재에 따르면 김좌진을 암살한 인물 박상실은 김봉환과 무관하며, 문제의 박상실은 공산주의자 이복림(본명 공도진, 1907~1937)이었다. 민족주의계 독립운동 진영과 사회주의계 독립운동 진영 간의 갈등 과정에서 완고한 반공주의자였던 김좌진이 암살당했고, 김봉환 역시 그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희생양이 됐던 것이다.(<만주 항일 파르티잔-잊혀진 독립운동가 허형식>, 선인, 2009) 이복림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다. 그는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간부로 활동하던 중 김좌진이 살해된 지 8년 후인 1937년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한다.

더군다나 강경애가 김봉환과 내연관계였다는 소문도 소문일 뿐 사실로 확인되지 않는다. 강경애는 김좌진이 암살될 당시인 1929년에는 고향인 황해도 장연에서 근우회 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강경애는 애당초 김좌진 암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평가받는 강경애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뛰어난 소설가로 활약하던 강경애는 결국 지병으로 불과 38세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아 간도 이주 직후부터 간도와 서울을 왕래하면서 치료나 요양을 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강경애의 사망 소식은 1944년 6월21일자 매일신보에 “강경애 여사(여류소설가) 16일 장연읍 자택에서 별세”라는 뒤늦은 부고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해방 직후인 1946년 이틀에 걸쳐 개최된 <제1회 전국문학자대회>(종로 YMCA 강당, 2월8~9일)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잔학한 압정 아래에서 우리 민족문학을 북돋우기 위해 고투하다 쓰러진 스물세 명의 문학자를 위한 추도 묵상”이 있었다. 이때 전국에서 모인 문학자들의 추도 대상이 된 23명의 문학자에는 심훈·김소월·이육사 등과 더불어 강경애도 포함돼 있었다.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는 2005년 뒤늦게 일제강점기에 억압받던 하층민과 항일무장운동가들의 삶을 소설로 훌륭하게 그려 냈다는 점을 들어 강경애를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경애는 지금도 대한민국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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