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예슬 기자
"전태일이 일하던 당시에는 근로기준법이 없었다?"

전태일 거리축제 한편에 마련된 '전태일 퀴즈' 코너. 이 문제에 최춘자(76)씨는 자신 있게 “없었다”고 답했다. 근기법이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행사 관계자 설명에 그는 “당시 너무 열악했으니까 법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최씨는 이날 모자를 사러 평화시장에 들렀지만 흥겨운 노랫소리에 이끌려 전태일 거리축제에 참여했다고 했다. 풍물놀이연구소는 전태일다리 위에서 길놀이를 하며 축제의 시작을 알렸다. 전태일 열사 모습이 인쇄된 4미터 넘는 대형깃발이 허공에 펄럭이자 좌중의 시선이 하늘로 쏠렸다.

지난 19일 오후 서울 중구 평화시장 앞 청계천 버들다리(전태일다리)에서 '2019 전태일 거리축제'가 열렸다. 청계천 버들다리는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장소 근처에 있다. 열사의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 전태일재단은 전태일 열사가 세상을 떠난 11월13일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기일 9월3일 사이에 매년 전태일 거리축제를 하고 있다. 올해로 다섯 번째다.

"시민의 손 끝에서 탄생한 전태일 목도리"

행인은 하나둘 가던 길을 멈추고 공연을 관람했고, 몇몇은 전태일동상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날씨가 좋아 평화시장에 나왔다는 강금순(58)씨는 양말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인 '양말목'을 이용해 컵받침 만들기를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직조 틀에 알록달록한 양말목을 걸어 씨줄 날줄 교차하며 체크무늬 네모난 컵받침을 만들었다. 행사 관계자는 컵받침을 엮어 목도리를 만든다고 했다. 목도리는 전태일동상 목에 걸어 줄 예정이란다. 강씨는 "(행사 안내자가) 두 개만 떠도 된다고 했는데 목도리를 만든다기에 세 개 떠서 두 개 기증하고 하나는 기념품으로 가졌다"며 아이처럼 웃었다. 고사리손을 이리저리 옮기며 천을 교차하던 한 아이는 컵받침이 완성되자 "색이 너무 예쁘지 않아요?"라며 아빠에게 자랑하기 여념 없었다.

공업용 재봉틀 앞에 앉은 임영남(76)씨는 오랜만에 잡은 재봉틀이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내 작은 주머니를 뚝딱 만들어 냈다. 1976년까지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했다던 그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동료에게 들었다고 했다. 임씨는 "당시에는 모두가 세상에 무관심했고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줄 알았다"며 "한 달에 한 번 겨우 쉬었는데 전태일 그 친구가 죽고 난 뒤 봉제공장이 전부 일주일에 한 번씩 쉬게 됐다"고 전했다.

"거리축제 계기로 또 한 번 떠올리는 전태일"

"전태일은 대학에 다니던 대학생이었다. 맞을까요. 틀릴까요."

행사 진행요원 물음에 이화순(62)씨는 고개를 갸웃하다 자신 없다는 듯 "맞다"고 답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재단사였고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졌던 청년"이라는 설명에 이씨는 "대학생들이 전태일을 많이 이야기해서 같은 대학생인 줄 알았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오늘 덕분에 너무 좋은 걸 배운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전태일 거리축제는 전태일에 관한 기억을 소환하는 계기가 됐다. 아내와 함께 축제를 찾은 서기석(63)씨는 "중학교 다닐 때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다는 소식을 라디오뉴스로 들은 기억이 난다"며 "그 사람(전태일) 덕분에 지금 잘 살게 된 거 아니냐"고 되물었다.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던 이용자(62)씨는 "여기 지나다 보면 항상 가슴이 아프다"며 "꽃다운 나이에 갔으니깐" 하고 말끝을 흐렸다.

이수호 아름다운청년 전태일기념관 관장은 "전태일 거리축제로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전태일을 만나 보고, 노동자를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어우러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날 축제는 시민들이 짠 72개의 컵받침을 엮어 만든 대형 목도리를 전태일동상 목에 거는 행사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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