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명호 변호사(법무법인 오월)

“선생님, 억울하신 마음은 이해되지만 이 건은 소송으로 안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라리 해고당하고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습니다.” 명색이 노동변호사라는 자가 하는 말이 해고당했으면 좋았을 거라니, 말한 나조차 황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실화다. 변호사라는 자가 소송하지 말자 하고, 노동자를 변호한다는 자가 해고당한 게 아니라서 안타깝다고 한다.

변호사는 의뢰인과 상담해서 사건을 수임하고 재판에 출석해 변론하는 일을 한다. 상담·수임·재판이 변호사의 일이다. 그중에 제일은 수임이니, 일을 맡겨 줘야 재판도 할 수 있고 수임료도 받을 수 있다. 수임료를 받아야 사무실을 운영하고 생계를 이어 갈 수 있다. 초년차 때 어떤 선배 변호사는 승패와 상관없이 일단 무조건 수임하고 최대한 열심히 싸워 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노동변호사는 그럴 수 없다. 소송에는 승패가 있고 패자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패소한 노동자는 사용자의 변호사 비용까지 물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해고 소송에서 패소하면 심급당 440만원까지 물어 줘야 한다. 수년에 걸쳐 대법원까지 갔다가 지면 무려 1천320만원이다. 회사에는 껌값일지 몰라도 해고된 노동자에게는 인생 리셋이 간절해지는 숫자다.

그래서 사건을 고르고 골라야 한다. 이길 수 있는 사건, 이겨야만 하는 사건들로 신중히 골라야 한다. 당사자가 느끼는 억울함의 정도보다 법원이 인정하는 정당함의 잣대로 설명한다. 승소할 때 얻을 이익보다 만에 하나 패소했을 때 부담할 비용을 먼저 말할 수밖에 없다. 자기편인 줄로만 알았던 변호사가 “어렵다, 안 된다” 하고 시작도 전에 패소 운운하니 야박하고 서운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선고 날 패소 소식을 들으면 변호사는 한동안 가슴 시릴 뿐이지만 당사자는 삶으로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할지 법원에 소를 제기할지도 고민이다. 노동위원회로 가면 3개월이면 결과를 받을 수 있고 선임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소송으로 가면 최소 6개월 이상은 걸리고 변호사 선임료도 부담스럽다. 그러나 회사가 노동위원회 판정에도 수긍하지 않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더 긴 싸움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행정소송 끝에 확정 판결을 받고도 회사가 이행하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위해 다시 민사소송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소송에서 이기면 회사에 변호사 비용을 청구할 수 있지만 노동위원회 판정은 이기든 지든 각자 부담이다. 승소가 예상되는 사건은 소송을 통해 다투는 게 낫다.

의뢰인 이야기를 들어 보니 유리한 사실관계가 많다. 해 볼 만하다. 그런데 그는 이미 해고돼 회사에 접근할 수 없고 증언해 줄 동료들은 아직 재직 중이다. 일할 때 찍어 둔 사진은 따로 없고, 증거가 될 카톡과 문자는 지운 지 오래다. 판사는 증거로 설득해야 하는데, 증거는 회사가 갖고 있다. 법원에 문서제출명령신청을 한다. 법원의 제출명령에도 회사는 자료가 없거나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법령에 따라 회사가 마땅히 작성하고 보관해야 하는 자료라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재판을 하염없이 지연시킨다. 믿었던 동료들이 회사 압박에 못 이겨 거짓 진술서라도 제출하면 그야말로 멘붕이다. 변호사가 직접 발로 뛰어 증거를 수집하고 의뢰인 멘탈 관리도 신경 써야 하는 이유다.

지금까지는 신중히 상담하고 열심히 변론해서 이기면 끝인 줄 알았다. 7년에 걸친 지난한 법정싸움에서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고도 차가운 바닥과 뜨거운 하늘에서 “법대로 하라”고 외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노동자들을 보기 전까지 그랬다. 회사는 1·2심에서 패소하고도 대법원 판결이 남았으니 직접 고용할 법적 의무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회사로 들어가지 않으면 모두 해고된다고 협박했고 직접 고용돼도 잡초나 뽑게 될 거라고 조롱했다. 법대로 하자던 이들이 대법원 판결을 받고도 책임지지 않는다. 노동자를 변호하는 일이 법정싸움인 줄만 알았던 나는 틀렸다. 사법부가 최후의 보루라고 달랬던 나도 틀렸다. 우리가 다시 거리로 현장으로 나가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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