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권오설 선생(1897~1930년)

경북 안동 사람들은 자신들을 ‘성조기·태극기 부대’ 같은 친미극우집단으로 보지 말아 달라고 한다. 면면히 이어져 온 건전한 정통보수로서의 자부심이 가득한 안동 사람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조선조의 가장 대표적인 성리학자 퇴계(退溪) 이황, 임진왜란 당시 4도 도제찰사로서 후세에 징비록(懲毖錄)을 남긴 서애(西厓) 류성룡, 한일병탄 이후 솔가(率家)해 서간도 독립운동기지를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친 석주(石洲) 이상룡과 김동삼, 의혈단의 김시현 등 수많은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아는 ‘원조보수세력’을 자신들의 기득권 고수를 위해 나라도 백성도 안중에 없는 ‘사대수구세력’과 결코 동일시할 수 없다.

안동, 보수와 진보의 원조

안동은 보수만이 아니라 진보의 뿌리이기도 하다. 그만큼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배출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金在鳳), 중앙집행위원 이준태(李準泰)와 함께 고려공산청년회 2대 책임비서로서 2차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을 겸한 애국계몽운동가·농민운동가·노동운동가·사회주의자·독립운동가 권오설(權五卨, 1897~1930)이다. 권오설은 안동군 풍서면(현재 안동시 풍천면) 가곡리 안동 권씨 집성촌 가일마을에서, 김재봉은 그 뒷산 넘어 풍산 오미마을에서, 이준태는 풍산들 건너편 우롱골(풍산읍 상리)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권오설은 1897년 아버지 권술조(權述朝)와 어머니 풍산 류씨 사이에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 사장을 지낸 권오직이 그의 첫째 동생이다. 둘째 동생 권오기도 해방공간에서 안동 풍산면의 노동조합장으로 활동하다가 월북했다고 한다. 권오설은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7년 집안의 남명학교와 하회마을 내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1916년 대구고등보통학교(경북고등학교의 전신) 재학 중 조선역사연구회 활동을 하고 친일교사 배척, 노예교육 반대를 주장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퇴학당해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했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퇴했다. 당시 중앙고보에는 훗날 중국으로 망명해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을 맡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 김두봉 선생이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애국계몽운동에서 노동운동·농민운동으로

졸업장도 없이 호구지책으로 전남도청에 근무하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해 몇 개월 옥고를 치르고 귀향했다. 이때부터 권오설은 본격적인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독립운동가들의 진로가 흔히 그렇듯이 권오설도 독립운동을 위한 교육기관을 만들고 애국계몽운동부터 시작했다. 우선 문중 소유의 서원에 원흥학술강습소, 일직면 소호강습소 등을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했던 것이다. 1920년 5월 안동청년회, 9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 결성을 주도했고 안동 예안면 출신 김남수를 만나면서 사회주의 활동에 들어갔다. 1923년에는 풍산학술강습회·풍산청년회를 만들고 이준태·김남수 등과 함께 풍산소작인회를 조직해 농민운동의 새 장을 열기도 했다.

3·1 운동 이후 조선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은 부르주아민족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점차 노동계급의 선진사상에 의해 지도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1920년대 초·중엽 마르크스·레닌주의가 급격히 보급·확산되고 수많은 노동단체·농민단체·청년단체들이 조직되고 대중투쟁이 발전했다. 1920년 4월 서울에서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조선노동공제회가 창립되고 그 전후로 노동대회·노동조합·노동회 등의 이름을 가진 노동단체들이 전국 도처에서 연이어 조직됐으며, 1920~1922년 163건 파업투쟁에 연인원 8천862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노동운동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조선노동공제회가 해체되고 조선노동연맹회가 조직됐으며, 노동자·농민의 대중단체들을 통합하기 위한 활동이 벌어져 1924년 4월 서울에서 조선노농총동맹이 창립됐다. 농민들도 각지에서 소작인조합·소작상조회·농우회·농민공제회·작인동맹 등 농민단체들을 수많이 조직했다. 1925년 말 소작농민들 중심의 농민단체가 126개였고, 1920~1925년 무려 610건의 소작쟁의에 참가한 인원이 3만명에 달했다. 청년학생운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1924년 4월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됐고 1925년 말 청년단체가 847개, 학생단체가 185개였다. 1920~1925년 일어난 동맹휴학은 234건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 2대 책임비서

1924년 권오설은 풍산소작인회의 대표로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이즈음 사상서클 ‘화요회‘에 가입했고 노동자·농민의 의식을 높이는 교양강사로 활약했다. 풍산 소작쟁의, 북풍 소작쟁의, 암태도 소작쟁의, 대동인쇄공장파업, 서울전기회사 전차승무원파업 등 전국 각지의 농민운동·노동운동을 지도했다. 1925년 1월 그는 김재봉·김단야 등이 주도하던 코르뷰로(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후신) 국내부에 가입해 조선노농총동맹 내의 당 세포 책임자를 맡았다.

당시 사회주의운동세력의 분파인 화요회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창당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개최를 결의했는데, 권오설은 대회 준비위원으로 참가했다. 마침내 1925년 4월17일 조선공산당이, 그 다음날 방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가 결성될 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직부 책임을 맡게 됐다. 그해 11월 신의주사건으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어닥쳐 김재봉·박헌영 등 대부분 간부들이 체포·구금되자 12월 진주 출신 농민운동가·노동운동가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2차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때, 1대 책임비서 박헌영에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2대 책임비서를 맡고 조선공산당의 당연직 중앙집행위원을 겸해 활동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한 조직 파괴만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 사상과 노선이 부재했고 모스크바 국제당만 쳐다보는 각 분파들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민족해방과 사회변혁 주체인 민중 속에 튼튼히 뿌리박지 못했던 근본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건설은 신구사조의 교체와 운동의 질적 변화를 보여 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며 노동운동·농민운동 등 대중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발전을 추동했다.

6·10 만세운동 기획-제안-준비

1926년 4월 말 순종의 사망을 계기로 각계 민중들 속에서 반일감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권오설은 박래원·민창식 등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분산적으로 진행되는 투쟁을 전국적 반일시위투쟁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수립하고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얻어 6·10투쟁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6·10 만세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했다. 그런데 그 비밀이 종파분자들에 의해 일경에 알려졌고 만세시위가 일어나기 직전인 6월7일 권오설은 체포되고 말았다. 반일시위준비위원회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으나 애국적 민중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26년 6월10일 순종의 장례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나자 중앙고보 학생 이선호가 뛰쳐나오며 학생 300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1천여장의 격문을 살포했다. 이는 6·10 만세운동의 신호탄이 됐다. 수만 명의 서울시민들이 “조선독립 만세!”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벌였다. 6·10 만세시위를 통해 조선민중은 그 어떤 고난에도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존엄을 지키려는 불굴의 의지를 과시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서울에만 경찰과 군인 7천여명을 동원해 진압했고 학생 1천여명을 체포했다. 울산·평양 등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이어지기는 했으나 당초 계획만큼 널리 확산되지는 못했다.

권오설은 100여명의 활동가들과 함께 체포·구금됐다. 이른바 2차 공산당 검거사건이다. 그는 경찰서·형무소에서도 일제에 맞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오랜 심문 과정을 거쳐 1928년 2월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출옥 100일을 앞둔 1930년 4월17일 조선공산당 창당 5주년을 맞는 그날, 일제의 고문으로 온몸에 피멍이 든 채 순국했다. 그의 나이 34세 때 일이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각오한 권오설의 투쟁정신은 그 당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불철저한 사회주의자들의 은폐된 배신행위와 뚜렷이 대조된다.
 

철제관 속의 붉은 항일열사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권오설의 장례도 새로운 반일저항의 불씨가 될까 두려워 사회장을 금지했다. 쓸쓸한 가족장으로 치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시신마저 뚜껑이 용접된 철제관 속에 가두고 봉분도 없는 평장으로 묻게 했다. 고문으로 학살당해 처참하게 훼손된 권오설의 육신을 은폐하고 조국해방과 만민평등을 향한 그의 붉은 영혼을 경계했던 것이다. 그 철제관은 현재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권오설의 무덤도 선영이 아니라 가일마을 인근 풍산들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다가 무려 78년이 지난 2008년 선영으로 옮겼다. 제2의 3·1 운동이었던 1926년 6·10 만세운동을 그 주도세력이 사회주의 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저평가한다면, 아직도 독립운동 선열들을 철제관 속에 넣어 묻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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