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일본의 경제보복을 또다시 노동자 희생으로만 극복하려 한다면 한국은 회복불능 상황이 될 것이다.” 광복절 전날인 지난 14일 일본과의 무역분쟁 대응 민관정협의회에서 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이 한 발언이다. “연구개발 및 기술부문에서 일본보다 앞서기 위해서는 근로시간 유연성, 환경규제 등 기업들의 여건이 최소한 일본보다 불리하지 않도록 법적·행정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한 손경식 한국경총 회장 의견에 대한 반박이었다. 위기와 어려움이 닥치면 힘을 모아 건너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 아니던가.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다.

아직까지 이번 분란의 본질과 그 규모조차 확인된 일이 없다. 정부에서 내놓은 전망도 그저 뜬구름 잡는 얘기다. 곧 나라가 망할 것같이 말하더니, 한 달여가 지난 지금 언제 그랬는지 싶을 만큼 뉴스에서 사라졌다. 도대체 경총에서 주장하는 ‘연구개발 및 기술부문’ 어디에서 얼마만큼 지원이 부족한 것인지, 그 원인이 ‘근로시간 유연성과 환경규제’ 때문인지도 알 길이 없다. 과연 현재 우리의 노동환경 규제가 연구개발이 어려울 만큼 ‘일본보다 더’ 엄격한가? 동의하기 어렵다. 최근 산업통상자원부 발표에 따르면 일본의 수출규제로 아직까지 국내기업이 입은 피해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사용자 편에 기운 듯하다. 여당이 앞장서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힌 격이랄까.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도입 시기를 1년 이상 늦추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원내수석부대표가 발의했다. 그것도 모자라 재량·선택근로, 상시적인 특별연장근로 등 유연노동 확대를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조치 간소화, 사업장 내 화학물질 관련 규제완화 등도 요구한다. 이보다 앞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사업장 점거행위 금지 등을 포함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발의해 놓았다.

이 모든 규제를 풀면 일본 아베 정부가 걸어온 무역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인가. 원인을 분석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할 의지는 찾을 수 없다. 정부가 앞장서 분쟁 해소를 위해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언제 발생할지도 모르는 아득한 위험을 핑계로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희생을 가장 먼저 들이대다니. 언제까지 ‘경제위기’와 ‘노동자 양보’를 짝으로 묶을 것인가.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뻔뻔하다.

이런 모습에 비해 최근 김주영 위원장의 일본 무역도발 대응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국노총과 일본노총(렌고)은 한일 간 무역문제가 양국의 건전한 경제발전과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의견을 함께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 지난달 11일 무역분쟁이 발발한 즉시, 김주영 위원장과 리키오 코즈 렌고 위원장이 한 합의다. 크게 보도되지 않아 다소 아쉬움은 있었지만, 한일 무역분쟁을 노동자들이 앞장서서 해소하겠다는 매우 의미 있는 선언이다. 정부와 정치권조차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그 누구보다 앞서 양국 노동자들을 대표한 가장 효과적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양 대표자의 합의는 분쟁의 본질을 제대로 꿰고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이것은 무도한 아베 정권 차원에서 걸어온 싸움일 뿐이다. 전체 일본시민과 노동자들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한 공세는 아니다. 오히려 양국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와 시민은 서로 신뢰하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우호적인 이웃이길 원한다. 그렇지 않고 아베 정부의 고약한 술책을 그대로 좇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양국 노동자에게 돌아온다는 점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때문에 ‘NO 재팬’ 같은 무분별한 분노 발산이 아니라 국면에 맞는 냉정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지난달 말 김주영 위원장은 국제노총 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ITUC-AP) 일반이사회에서 태평양 각국 대표자들에게 “ITUC-AP가 정부 간 통상문제가 노동자의 양질의 노동 실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폭넓은 정보와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돌이켜 보면 지난 한 달여,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이 힘을 얻고 있다. 김주영 위원장과 리키오 코즈 위원장의 판단이 정말이지 옳았다.

너무나 혼란스러운 요즘이다. 우리가 알았던 옳고 그름의 기준마저 흔들리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구성원 각자가 본분을 지키는 게 중요합니다” 하고, 수십 년간 노동운동을 해 온 어떤 선배가 조용히 조언한다. 자기의 위치와 본분을 잊어버리고 그저 시끄러운 소리만 앞세운 자들이 판을 치고, 이번이 기회라 판단하고 아예 자신들의 이익을 밀어붙이려는 자들까지. 스스로 본색을 드러내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노동자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자기가 맡은 노동을 묵묵히 해 나가는 것이 최선책이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부원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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