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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과 ‘개량’의 단상
▲ 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어제 오후 나는 ‘오늘 칼럼은 뭘 써야 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매일노동뉴스를 뒤적거렸다. 노예노동을 거부하며 노동허가제를 요구했다는 이주노동자대회 소식에 ‘퇴직금에서 빼 국민연금에 넣자’고 재계가 주장했다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국민연금개혁과 노후소득보장특별위원회 소식, 그리고 KTcs 불법파견 진정사건 처리가 지지부진하고, 노조파괴로 악명 높은 유성기업에서 회장의 판결선고를 앞두고 사측이 집중교섭을 제안했으며, 직장내 괴롭힘을 금지한 근로기준법 시행 이후 하루 평균 16.5건 진정사건이 접수됐고, 파리바게뜨에서는 사측이 노사합의에도 제대로 된 노조사무실을 내주지 않아 노조가 승합차에 임시 사무실을 차렸으며, 노조설립 후 포스코에서 노조간부들을 대량징계해 왔고, ‘현대차·기아차 불법파견 문제를 해결하라’며 김수억 금속노조 기아차비정규직지회장이 다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는 소식까지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고용 등 권리와 노조활동 자유는 여전히 투쟁 중이라고 읽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서 1940년대초까지 동북항일연군 참모장으로 북만주에서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벌이다 전사한 항일명장 ‘허형식’편 부분에서는 일요일밤 KBS ‘역사저널 그날’에 방영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의 모습까지 겹쳐지면서 여러 감정과 생각이 교차해서 내 머리를 스쳐 갔다. 하지만 여기까지 읽고서도 나는 뭘 써야 할지 정하지 못했던 것인데, 그 다음장을 읽고서야 찾을 수 있었다. 이번주 윤효원의 ‘노동과 정치’란에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의 단상”이, 한석호의 ‘노동운동?!’란에는 “나는 개량주의자다”가 제목으로 게재돼 있었고, 그걸 읽고서 나는 오늘 이 ‘노동과 법’ 칼럼을 쓰기 시작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노동현장의 아우성보다는 추상적인 이론에 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인가.

2. 윤효원의 칼럼은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과거 사노맹 활동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해서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론’의 의의를 현재적 시점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한미동맹과 외국군 주둔, 분단으로 민족모순이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재벌의 독점체제는 더욱더 강화되고 있으니 남북한 화해와 교류, 그리고 경제민주화와 노동존중 등을 위해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극복을 위한 반제와 반독점의 의의는 여전하고, 지배층만의 자유가 아닌 노동자를 비롯한 피지배층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민중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로서 의의가 있다는 취지로 쓰고 있었다. 다만 그 실현을 위해 ‘혁명’이 여전히 필요한지에 관해서는 “늘 만물은 변하며, 항상 미래는 열려 있으니 금기시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고 했다. 이렇게 그는 여전히 혁명론의 의의를 찾고 있었다.

이에 대해 한석호의 칼럼은 “뜬금 없는 고백”이라며 자신이 “운동판에서 공인된 개량주의자”라고 말하고서, 대우자동차 투쟁으로 감옥에 가서 마르크스·엥겔스를 다시 읽으면서 깊은 고민을 했고, “현 단계는 혁명적 체제전복의 시대가 아니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으며, “현단계 운동 목표로 북유럽 체제”를 주장하는 자신은 이제 당당히 “나는 개량주의자다”라고 선언하노라고 쓰고 있었다.

3. 글쎄다. 저 엄혹했던 시대에서 쓴 글이었다면, 보다 심각하게 나는 읽었을 것이다. 도대체가 혁명이 무엇이고, 개량이 무엇인지를 말할 필요가 없는 이 별 볼 일 없는 시대에 심각하게 쓴 글을 읽자니 도무지 심각해지지 않았다. 지금 이 세상에서 혁명을 말하고, 오늘 이 나라에서 개량을 말하다니. 혁명을 논하던 심장에선 더는 붉은 피가 솟구치지 않는다. 개량은 혁명으로 나아가는 노동운동이 있을 때나 설 자리가 있다. 혁명이 없으면 고백할 개량도 없다. 혁명이 없는데 개량이라니 뭔 ‘뜬금없는 고백’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개량을 고백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철지난 전향선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도 머리를 맞대고 뜨겁게 논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혁명은 잊혀진 지 오래다. 2000년대 초 대우자동차 해외매각 저지 및 정리해고 반대 투쟁의 거리에서도 이미 찾기 어려웠다. 당시 노동자·학생이 들었던 화염병과 쇠파이프·보도블록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혁명을 말하기에는 투쟁의 바람은 작기만 했다. 노동조합 개량주의자가 아닌 혁명주의자였어도, 기껏해야 그 자그마한 계기의 하나가 작은 불씨가 될 수 있기를 기대했을 뿐이다. 한석호가 조직실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금속산업연맹은 소속 대우자동차노조와 함께 그 투쟁을 주도했다. 무슨 혁명을 말할 투쟁이 결코 아니었다. 전투적 조합주의, 그 이상은 아니었다. ‘조합주의’라는 규정에 부합하게 철저하게 조합원, 노동자의 고용 등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니 그 투쟁으로 구속되고서 기존의 운동을 심각하게 고민하고서 이제부턴 ‘혁명이 아닌 개량’이라고 선언할 무엇도 없었던 것이다. 현실의 변화를 꿈꾸는 운동은 현실을 떠난, 활동가의 머리 속에 떠도는 사투로는 전개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높은 수준으로 혁명의 그림을 상상했을지라도, 그가 발 디디고 선 노동운동이 그저 낮은 수준의 조합주의에 머물고 있다면, 그 운동을 위해 활동하는 그는 조합주의자인 것이다. 고백하고 말 것도 없다. 고백해 봤자 자신은 혁명가를 상상했노라고, 그렇지만 현실은 초라하게도 조합주의자로 머물렀노라는 실토일 뿐이다.

오늘도 여전히 반제반독점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대단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반자본의 노동운동이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의 시대를 거치면서 확립하게 된 혁명론을 사회주의세계체제가 붕괴되고, 그 이론이 꿈꾸던 세상을 온전히 실현한 나라가 있다고 보기도 어려운 이 세상에서도 여전히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단계론과 계급연대에 기반한 이 혁명론은 1930년대 중반 정립된 이후에도 해당 시대와 나라, 거기서 노동운동의 상태에 따라 다양한 변주로 나타났다. 식민지에서는 반제에, 제국주의 나라에서는 반독점에 주된 투쟁을 전개하도록 했던 것인데 그것은 냉정히 돌이켜보자면 식민지 민족운동으로는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제국주의 나라나 독립된 나라에서의 운동이론으로는 성공을 거뒀다고 볼 사례조차 찾기 어려웠다. 더구나 2차 대전 이후를 신식민주의로 규정해서 애써 그 이론의 생명을 유지해 왔지만, 민족운동에서도 이전과 같은 흥행은 보장되지 않았다. 과연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나아가는 노동운동의 전략이론으로 타당한 것일까. 민중민주주의의 내용이 무엇이고, 이를 관철할 절차가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정립돼 있다고 보기 어렵다. 막연히 부르주아민주주의·의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민주주의라고 말했지만, 노동자 민중을 내세운 권력자의 지배 앞에서 그에 맞서 노동자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 주인되는 민주주의를 세워 낼 민주주의이론으로서는 한없이 부족했다. 오늘도 홍콩의 인민은 그 민주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치고 있다. 절차적 민주주의니 정치적 자유라고 그들이 외치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보잘것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민주주의와 자유야말로, 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한 기본전제여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4.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청년 허형식과 김원봉은 반제반봉건을 자신의 혁명론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식민지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투쟁이론으론 충분했다. 중국식으로 동북항일연군이든, 조선인민혁명군이든, 조선의용대든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겠다는 데에 그들은 이견이 없었다. 굳이 노동자·노동운동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일제강점기와는 전혀 그 사회성격을 달리한다고 할 만큼 자본의 지배는 전면적이다. 이에 따라 노동자는 굳이 계급연대를 내세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다. 제국의 식민을 말하기에는 자본에 국경이 없다. 오늘 국경을 넘어선 자본의 영토는 제한이 없다. 대북제재만 없다면 저 휴전선 넘어 당장 달려갈 정도다. 폐쇄적 시장 지배와 자원 강탈의 제국주의 식민은 더는 아니다. 여기서 반제를 외쳐도 그 의미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저 1980년대 뒤늦게 타올랐던 이 나라 사회운동은 재벌 해체의 반독점을 외쳤지만, 오늘 재벌은 대기업집단으로 불리고 더는 해체를 말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해체를 말한다 해도 본래 말했던 해체는 아니다. 독점과 과점의 해체를 말하는 바로 그 반독점은 말하지 않는다. 경제민주화와 노동존중이 반독점의 내용일 수는 없다. 이론만을 두고서 말한다면 오늘 이 세상에서,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이 이 모양인 것은 새롭지 않은 이론의 결과라고 말하겠다. 낡은 이론의 연명으로는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 나아가지 못한다. 할 필요조차 없는 시대의 고백으로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김기덕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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