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허형식 장군(1909~1942)

 

중국에는 널리 알려진 항일열사

중국 흑룡강성 수화시 경안현 청봉령 들머리에 기념비 하나가 서 있다. 전면에는 “항련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희생지”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간단한 내역이 기록돼 있다.

“허형식. 이희산으로도 불림. 남. 조선족. 중공당원. 중공북만성위 위원. 항련 제9군 정치부 주임. 제3로군 총참모장 역임. 1936년부터 1942년까지 경성(慶城)의 항련부대를 이끌고 파언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942년 8월2일 늦게(晩) 세 명의 항련 전사들을 이끌고 항련활동 상황을 시찰하던 중 청봉령 일대에서 비적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다 33세로 사망했다.”

남한에서 허형식은 낯선 이름이다. 북한 혁명열사릉에 그의 무덤이 있다. 중국 동북지역과 연변에서 발행되는 각종 역사서나 전기류 책에도 거의 빠짐없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허형식은 주하 일대에서 유격대에 참가해 희생되던 날까지 줄곧 광활한 북만땅을 오가며 항일무장투쟁을 벌여 빛나는 전공을 세운 우수한 정치사업일꾼, 고급군사지휘원이었으며, 북만항일부대의 훌륭한 본보기로 중국인민항일혁명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조선혁명렬사이다.”(<상지시 조선민족사> 중)

무엇보다 허형식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한 대부분 조선인들이 이북 출신인 데 비해 남부지방(경북 구미) 출신이라는 점, 의병장의 명성을 떨친 허위의 가까운 친척이라는 점, 만주에서 항일투쟁이 거의 끝나가던 마지막까지 직접 일제와 싸웠다는 점 등이 각별한 의미가 있다. ‘광야’를 쓴 혁명시인 이육사의 외당숙(외가 5촌 아저씨)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구미에서 태어나 만주로 이주하다

허형식(許亨植, 1909~1942)은 1909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허극(許克)이지만, 1930년 이래 주로 이희산(李熙山)이라는 가명을 썼다. 아버지 허필은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와는 4촌간으로 허형식은 허위의 5촌 조카가 된다.

왕산 허위가 일본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한 뒤 왕산 일가는 일제의 심한 감시와 탄압에 시달렸다. 1912년 허겸은 동생 허위의 유족들을 데리고 서간도 통화현 합니하로 망명했다. 큰아버지 허형과 아버지 허필도 허형식이 6세 되던 1915년 가족들을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했다. 1920년 경신참변 등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왕산의 일족들은 서간도를 떠나 일제 탄압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남한출신 동포들이 많이 살던 북만주로 이주했다.

1924년께 아버지 허필은 가족을 이끌고 요령성 개원현 이가태자(李家台子)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약방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가족들은 가난에 쪼들렸고 허형식도 생계를 위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허형식은 가난 때문에 정규학교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한학과 글공부를 배우는 한편, 힘든 노동을 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항일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다

1929년 북만주의 허형식 가족은 흑룡강성 하얼빈 부근의 빈현(賓縣)으로 이주했다. 빈현은 소수의 지주가 대토지를 소유한 지역으로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들이 대다수였다. 뒤늦게 이곳으로 이주한 대다수 조선농민들 삶은 더욱 고달팠다. 1927년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조직되면서 이 지역에 북만특위를 설치하고 빈농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빈현에서는 최용건이 1926년에 설치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군사부장과 중국공산당 빈현지부 서기를 겸하면서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허형식은 최용건의 지도를 받으며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허형식은 중공당 북만성위가 조직한 1930년 5월1일 메이데이 투쟁을 주도했다. 그는 40여명의 조선 청년들을 이끌고 하얼빈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을 습격했고, 이 사건으로 체포돼 심양감옥에 갇혔으나 곧 석방됐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대중운동을 주도하다가 다시 심양감옥에 수감됐다. 허형식은 심양감옥에서 고참 혁명가 김책을 만났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후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1931년 9·18 사변 후 중공당의 도움으로 석방된 허형식은 빈현특위 서기 김책의 지도 아래 농민운동을 조직했고, 1932년 1월 빈현 선전위원이 됐다. 1933년에는 중공당의 지시에 따라 이웃한 탕원(湯原)현으로 가서 항일유격대 창건을 지원하고 1천400여명의 반일회원을 조직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허형식은 다시 주하현(지금의 상지시) 흑룡궁지구로 파견됐고, 김책·리추악 등 조선혁명가들과 함께 대중조직에 힘썼다. 그는 친화력이 뛰어났고 대중을 조직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그는 농사일을 도와주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해결사가 돼 줘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흑룡궁당지부는 처음 5~6명에 불과했으나 허형식의 활동으로 조직원이 크게 늘어났다. 1933년 8월 허형식은 흑룡궁특별지부 서기로 임명됐다.

주하반일유격대와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

1933년 10월 북만지역에서 최초로 주하(현 상지시)에서 반일유격대가 조직됐다. 조상지가 대장, 조선인 이복림이 정치위원 겸 당지부 서기였다. 김책과 허형식·이계동 등 다수 조선인들이 활동했다. 1934년 6월 주하반일유격대는 산림대와 의용대를 흡수해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를 조직했고, 허형식은 3대대 정치지도원이 됐다. 같은해 가을, 부대가 개편되면서 허형식은 1대대장, 김책은 경제부 주임이 됐다. 허형식의 부대는 그해 겨울 고려영자에서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 100여명을 섬멸하고 많은 무기를 획득하는 큰 승리를 거뒀다.

1935년 1월 합동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3군 1독립사로 발전했고, 허형식은 2단장이 됐다. 허형식은 10여개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통해 유수하자의 일본군 공격, 대·소량자하의 일본군 농장 습격 등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계속된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소량자하 부근 우심산 전투에서 8명의 희생자를 내는 대가를 치렀다. 허형식은 단장에서 해임됐으나 불굴의 의지로 재기했다. 그는 하방한 지 한 달 반 뒤 40여명의 대원과 기관총 1정, 권총 10자루, 장총 20자루, 양포총 30자루를 갖고 돌아왔다. 허형식은 그해 가을, 유격대를 뒤쫓아 하얼빈에서 급파된 2천여명의 일본군·위만군 ‘토벌대’를 밤새 모닥불을 피워 놓은 채 감쪽같이 따돌리고 빠져나오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날의 일은 두고두고 전설처럼 회자됐다.

동북항일연군 3군 총참모장 겸 군장

1935년 겨울 허형식은 재편된 동북항일연군 3사 정치부 주임이 됐다. 허형식은 사문동(謝文東)의 민중구국군, 이화당(李華堂)의 자위군 등과 함께 동북반일연합군을 조직해 일본군·위만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1936년 9월 허형식은 중공당 북반성위 상무위원 및 동북항일연군 3군 1사 정치부 주임이 되었다. 1938년 6월에는 만주의 항일세력을 통합한 동북항일연군 3군 1사 사장이 돼 북만주의 해륜·경성현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무렵 일제의 대규모 공격으로 유격대는 큰 시련을 맞았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동북항일연군 내에서 투항·변절하는 자가 속출했다는 사실이다.

1939년 허형식은 중공당 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3군장이 됐다. 당시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중 최고위급에 속했다. 이 무렵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만주의 항일부대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주보중 등 동북항일연군 지도부는 역량 보존을 위해 소련으로 넘어가 조직을 재정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허형식은 소련으로의 월경을 거부하고 1941년 초 북만주에서 생존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200여명을 지휘하면서 완강하게 싸웠다.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파언·목란·동흥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소부대원들을 지도하기 위해 가다가 8월3일(희생기념비에는 8월2일) 경성현 청풍령에서 수행원 3명과 숙영 중 괴뢰만군에 발각되고 말았다. 허형식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는 전투 중 사망했고, 그의 목은 괴뢰군이 잘라 가져갔다. 시신은 짐승들의 먹잇감이 됐다.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사후 77년 만에 고향 후배들의 위령

허형식은 지금 남한에서는 잊힌 존재다. 허형식의 직계 후손은 대부분 북한에 살고 있고, 북한의 대성산 혁명열사릉에는 그의 묘지가 있다. 하얼빈의 동북열사기념관과 경안현 영열원, 경안현 인민공원 등 중국에서도 허형식의 사진과 업적이 전시돼 있지만 정작 그의 고향에서는 외면당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항일투쟁을 했던 많은 동지들은 그처럼 만주벌판에서 사망했다. 김책·최용건 등 해방 때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북으로 돌아가 북한 정권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북한 정권에는 관여할 수 없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지난 8월3일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회원들이 허형식 장군의 희생지를 찾아 추모식을 가졌다. 그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지 77년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 몇몇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그가 태어난 고향 구미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그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는 지난 4월2일 대구지방보훈청에 허형식 장군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도 해 놓은 상태다.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고 북한 혁명열사릉에 무덤이 있지만 남한에서 서훈을 받은 최윤구 선생처럼 허형식 장군의 독립유공자 포상도 이뤄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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