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료사진 정기훈 기자

정부가 일본 수출규제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수출규제와 무관한 방안까지 거론하면서 전문가들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사태를 빌미로 정부·여당이 노동계 반발을 의식해 미처 입에 담지 못했던 정책을 밀어붙이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다.

“생산량 늘리면 대체기술 개발하나”

6일 노동계에 따르면 일본 수출규제 대응과 관련해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노동시간 문제다. 더불어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를 맡고 있는 이원욱 의원이 내년으로 예정된 50~299인 사업장의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 적용을 유예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할 것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같은 당 최운열 의원은 고소득 전문직에 주 52시간을 적용하지 않는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반도체 핵심소재 3개 품목과 관련해 정부·여당이 기업에 인가연장근로를 허용하기로 한 데 이어 노동시간단축에 역행하는 정책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장시간 노동을 허용하는 것과 일본 수출규제는 연관성을 찾기 어렵다. 정부는 인가연장근로 허용에 대해 “수출규제 대상과 관련이 있는 기업과 해당 직무·직종으로 제한한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하지만 일본이 지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우대국가)에서 제외하면서 인가연장근로 확대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주 52시간 적용 유예나 제외 법안 추진은 뜬금없기까지 하다.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장은 “일을 많이 해 생산량을 늘린다고 해서 대체물질을 개발하거나 일본과의 기술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며 “노동문제를 언제든지 뒤로 돌릴 수 있다는 저급한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에 부는 ‘친기업 기류’

이원욱 의원의 근기법 개정 추진은 더불어민주당 당론은 아니다. 같은 당 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과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 사실 이 의원은 더불어민주당에서 노골적으로 ‘친기업 행보’를 하는 인사로 분류된다. 그는 지난해 11월 광주형 일자리 관련 광주시와 현대자동차 간 투자협상이 지연되자 “기업은 빠져 있고 노동만 부각되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광주지역본부가 투자협상에서 노동계를 배제한 것에 반발해 광주형 일자리 사업에서 철수했다가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한 얘기다. 이 의원이 주 52시간 유예 법안을 추진하는 것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여당에서 이 의원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당 환노위 소속 이용득 의원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서 반박하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이 의원은 "한때는 (더불어민주당에서) 노동시간을 단축하자고 열을 올렸다"며 "금방 분위기를 바꾸는 것을 보면 철학이라는 게 있는지 궁금하다”고 비판했다.

“ILO 기본협약 빨리 비준해야”
“협조 원하면 노동계와 협의하라”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이번 기회에 재계 숙원사안이나 규제완화를 몰아붙이려 한다면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당장 정부와 여당이 하반기에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본의 위안부 동원이 ILO 강제노동 협약(29호) 위반인 만큼 협약 비준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성희 소장은 “일본은 1932년에 29호 협약을 비준했으면서도 위안부 관련 대법원 판결에 보복을 하고 있다”며 “이럴 때일수록 빨리 협약을 비준한 뒤 ILO 상임이사국인 일본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대책을 마련하면서 노동계와 사전협의를 하지 않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병훈 교수는 "정부가 비상경제 상황에서 노동계 협조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한다면 협의절차를 밟으면 된다"며 "경제보복과 무관한 정책을 꺼내지 말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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