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독일처럼 일본도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고 분단됐더라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지금과 크게 달랐을지 모른다. 역사학자 하세가와 쓰요시가 쓴 <종전의 설계자들>(한승동 옮김, 메디치)을 읽고 드는 생각이다.

일본의 항복은 군사적 항복이었던 독일과 달리 정치적 항복이었다.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했고 소련군의 포성을 들으며 히틀러는 자살했다.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미군이 동중국해와 태평양의 경계에 있는 전략요충지 오키나와를 점령한 때는 1945년 6월23일이었다. 여기서만 미군 사상자 10만명, 일본군 사망자 11만명, 오키나와 민간인 사망자 12만명 등 참혹한 살육이 펼쳐졌다.

소련은 6월 하순 소련공산당 정치국·정부·군 합동회의를 열어 만주의 일본군에 대한 전면공격을 8월에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얄타회담에서 논의된 만주·사할린 남부·쿠릴열도 점거는 물론 일본군 도주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반도 북부를 점령하는 방안이 결정됐다. 홋카이도 점령 문제도 다뤄졌으나 스탈린은 최종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급박한 정세 속에서 미국은 7월15일 첫 번째 원폭 실험에, 7월17일 두 번째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7월17일부터 8월2일까지 베를린 인근에서 포츠담회담이 이뤄졌다.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과 애틀리, 소련의 스탈린이 참석했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합의한 대로 8월 중순에 소련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개시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이에 대한 트루먼의 반응을 <종전의 설계자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소련 요소가 트루먼의 원폭투하 결정과 무관했다고 논하기는 지극히 곤란하다. 소련의 전쟁개시 일시를 알았던 트루먼은 소련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인 8월 초에 원폭을 투하하는 것이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이때까지도 일본은 연합국의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하면서 결사항전을 고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일본 중립조약(1941년 4월 체결)으로 불가침 관계를 맺고 있던 소련의 알선을 통해 미국과 영국에 화평을 관철시키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일본은 황실 안위를 전제로 동아시아에서 소련의 어떤 요망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고 흘렸다.

소련의 참전 약속을 받아 내기 위해 포츠담에 간 트루먼은 원폭을 실전에 사용할 수 있다는 보고를 받고 마음을 바꿨다. "소련의 참전 없이 원폭을 사용해서 미국 단독으로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7월25일 첫 번째 원폭을 히로시마·고쿠라·니가타·나가사키 중 한 곳에 투하한다는 결정이 하달됐다. 미국 정부에 침투한 소련 간첩을 통해 미국의 원폭시험 일정을 파악하고 있었던 스탈린은 대일본 참전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트루먼의 참모진은 "원폭 투하가 이뤄지면 일본은 항복할 것이고, 소련은 전쟁에 참가할 수 없게 되고 중국에 대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이런 계산 속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을 빼고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소련은 '일각도 지체 없이' 서둘러 전쟁에 참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8월6일 오전 8시15분(워싱턴 시간 8월5일 오후 7시15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됐다. 폭심지에서 800미터 이내에 불덩어리가 일어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증발됐다. 조선인 2만명을 포함해 시민 11만명과 군인 2만명이 즉사했다. 트루먼은 "완벽한 성공"이라고 적힌 메모를 받고 활짝 웃었다. 하지만 일본은 즉시 항복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만에 히로시마의 참변이 도쿄에 보고될 리 만무했다. 1945년 들어 미국 공군의 대규모 공습에 시달리던 일본에게 원폭은 끔찍한 폭격의 하나에 불과했다.

8월8일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일본대사 사토를 불러 선전포고를 낭독했다. 불가침 중립 조약은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도쿄 시간으로 8월9일 0시가 되자마자 소련은 전쟁을 개시했다. 워싱턴 시간으로 8월8일 오후 3시(도쿄 시간 8월9일 오전 4시) 트루먼은 미소가 사라진 진지한 표정으로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그뿐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을 읽었다. 그 직전 두 번째 원폭을 실은 폭격기가 북태평양 티니언섬 공군기지를 이륙했다.

소련군 참전 소식이 알려진 8월9일 이른 아침 일본 외무성 지도부는 황실 안위를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전쟁을 종결하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일본 육군은 "제국은 가능한 신속히 대소 종전을 시도하고 소련의 중립을 유지하게 하면서 미국·영국·중국에 대한 전쟁을 속행한다"는 조치를 결정했다.

8월9일 오전 11시2분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폭이 떨어져 4만명이 즉사했다. 8월15일 쇼와 천황이 '종전'을 선언했고, 9월2일 맥아더가 일본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소련군은 홋카이도 코앞에 있는 쿠릴열도에 대한 점령에 들어가 하보마이 군도를 점령했다. 미국을 자극할 것을 두려워한 스탈린은 소련군의 도쿄 진주와 홋카이도 점령 작전을 포기하는 대신 쿠릴열도를 차지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종전의 설계자들>의 저자 하세가와는 "소련 참전 없이 원폭투하만으로도 일본은 항복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다음과 같이 답한다.

"현존하는 사료들로 판단하건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 두 발만으로는 일본을 항복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막대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원폭은 일본의 외교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런 변화를 가져다준 건 소련의 참전이었다. (중략) 만약 일본 정부가 더 빨리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전쟁종결 결단을 내렸다면 원폭투하도 없었을 것이고 소련의 참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계기로 저자는 1945년 5월 독일 항복, 6월 오키나와 함락, 7월 포츠담선언 발표 등을 꼽는다. 만약 그랬더라면 조선반도의 분단도, 한국전쟁도 없었을까. 패망한 독일과 베를린을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점령해 나치즘 체제를 허물어 버렸다. 패망한 일본과 도쿄를 미국·영국·중국·소련이 분할 점령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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