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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23] 불세출의 항일명장,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양세봉 장군

1932년 1월 만주 신빈현 하북. 교포인 서세명의 집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조선혁명군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국민부는 재만 조선인들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자치정부라고 할 수 있다. 정의부를 주축으로 참의부와 신민부 일부가 참여해 1929년 4월 출범했다. '이당치국' 원리에 입각해 조선혁명당이 국민부를 지도했고 무장대오로 조선혁명군을 편제했다. 즉 당·정·군의 유기적 체제를 갖춘 터여서 3자가 모여 회의를 한 것이다.

1931년 9월18일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했다(만주사변). 일본군은 국민부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통화·유하·환인·신빈·청원 등 남만주 지역의 각 현·읍을 점령해 조선혁명군 등 항일무장단체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최동오·양기탁 등 노장층은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상태에서 강대한 적과 싸우기 힘드니 중국 관내로 퇴각하자고 했다. 이에 반해 양세봉·김보안·이호원 등 소장층은 혁명가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동포들과 동고동락했는데 어려움에 처한 그들을 외면하고 중국 관내로 이동하는 것은 양심상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회의는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회의 결과 중국 관내로 이동하자는 관내 이동론에 대해 만주에서 동포들을 기반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자는 만주 견지론을 채택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인 1월20일 일제의 급습으로 김보안·이호원 등 19명이 체포됐다(신빈사건). 남은 사람들로 다시 지도부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 당수격인 당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고이허, 국민부 집행위원장에는 양하산, 조선혁명군 총사령에는 양세봉이 각각 선출됐다.

완벽한 군사 지도자

우리에게는 양세봉(梁世峰)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본명은 양서봉(梁瑞鳳)이다. 1896년 평북 철산의 가난한 소작 농가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자 가난을 견디지 못해 1917년 가족과 함께 압록강 넘어 만주 신빈현으로 이주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일대 조선인들도 대열에 동참했다. 양세봉은 신빈현 홍묘자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이후 무장투쟁의 한길을 걸었다.

1922년 독립단 대장 정창하 휘하의 지방공작원으로 항일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천마산대 독립군에 참여했고 1923년 광복군 총영에 합류했다. 참의부와 정의부의 무장대오에서 활동하다가 3부 통합운동을 거쳐 1929년 12월에 조선혁명당이 조선혁명군을 창설했을 때 부사령이었다. 1930년 조선혁명군이 편제를 개편하면서 2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1932년 총사령이 됐다.

항일무장투쟁으로 잔뼈가 굵은 양세봉이었지만 타고난 천성은 온화해 부하와 부민들에게 자상한 보살핌을 주는 덕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양세봉 휘하에서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계기화는 자신은 엽초를 피우면서 부하들에게는 궐련을 사다 줬으며 아무리 성난 일을 저질러도 욕을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양세봉 자신도 조선 독립을 위한 초지를 끝까지 관철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할 때 동포를 착취한 사실이 없었으며 부민이 신뢰하고 비호해 줬다는 말을 한 것으로 봐서 그가 부하들로부터 신뢰를 받았으며 동포들로부터도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를 회상하는 사람들이 군신(軍神)이라는 최상의 찬사를 보낼 만큼 그는 군사 지도자로서 완벽했던 것이다.

양세봉이 총사령에 오른 1932년은 자신에게도 조선혁명군에게도 많은 전과를 올린 빛나는 해였다. 다수 간부가 체포된 신빈사건 이후 그는 조직의 위기 상황을 맞아 활로를 개척하기 위해 당취오·이춘윤·왕동헌 등 요령민중 자위군을 비롯한 중국의용군과 적극적으로 연대해 나갔다. 그해 4월 양세봉은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신빈현 영릉가를 공격했다. 만주사변 후 첫 전투였다. 격전 끝에 일본군과 만주군 80여명을 섬멸했다. 전투기까지 동원한 일본·만주군에 쫓겨 신빈현성에서 철수했으나 만주족 이춘윤 부대와 공동으로 다시 반격해 성을 탈환했다. 5월8일 일·만 연합군이 다시 영릉가를 공격해 오자 조선혁명군은 중국 부대와 함께 이틀간 격전을 치르며 사수했다. 영릉가 전투 후 이곳에 사는 중국인들이 조선혁명군을 위로하기 위해 옷을 한 벌씩 해 줬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현지인들의 지지를 받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왼쪽)와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 양세봉 장군 묘비

조선혁명군 명성과 위상을 높이다

영릉가 전투 이후 신개령 전투에서는 200명의 적을 살상했다. 5월 중 6차례 전투에서 적 1천여명을 살상·포로·실종케 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에는 조선혁명군의 최윤구·조화선 부대 단독으로 일·만군 80여명을 살상하는 승리를 거뒀다. 영릉가 전투의 승리와 연이은 전과로 인해 남만주 일대에 양세봉과 조선혁명군의 명성과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만주 일대에서는 중국의용군과 연대해 공동으로 투쟁하는 한편 국내진입작전도 독자적으로 수행했다. 조선혁명군 부대원들이 평안북도 출신이 다수라는 점을 이용해 압록강이 얼어붙은 겨울철에 주로 평안도 지역으로 소부대 단위로 밀파해 국내로 침투시켜 일제 기관 습격과 친일파 처단, 군자금 획득 등의 투쟁을 했다. 때로는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이선룡의 경우 그의 고향인 장호원까지 가서 동일은행 장호원지점을 습격했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조선혁명군의 국내진입작전은 1932년에 16차에 걸쳐 101명, 1933년에 10차에 걸쳐 142명으로 집계돼 있다. 이러한 기록은 일제에 발각되거나 체포돼 드러난 사례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양세봉 총사령은 전투에 필요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통화현 강전자에 속성 군관학교를 설치하고 400여명의 장교와 사병을 양성했다. 당시 조선혁명군은 현역인 중앙군과 예비역인 지방군으로 구분됐는데, 중앙군은 300여명이었다. 강전자 군사학교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을 편입시켜 총병력 400여명, 각종 무기 500여자루를 보유한 군사력을 갖춘 부대로 성장시켰다. 사령부는 신빈현 왕청문에 두고 5개 부대로 편제했다. 양세봉과 조선혁명군이 1929년부터 34년까지 5년간 벌인 전투는 80여차례로, 저격한 일본군이 1천명에 이른다.

양세봉과 조선혁명군을 눈엣가시로 여긴 일본군은 양세봉 잡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1934년 8월 일본군 밀정 박창해는 평소 양세봉 총사령과 친분이 있고 조선혁명군에 대해 직간접으로 후원을 한 중국인 왕명번을 꼬드겼다. 왕명번은 중국인 사령관이 군사문제 협의를 요청했다고 양세봉을 유인했다. 양세봉이 부관들과 신빈현 왕청문의 사령부를 떠나 남쪽 방향의 향수하자향 소황구촌으로 넘어가는 언덕에 도달했을 때 갑자기 길 옆의 수수밭에서 일본군이 뛰어나왔다. 양세봉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그때가 1934년 8월12일(9월20일 설도 있다). 그의 나이 39세였다. 참으로 가슴 아픈 최후였으며 민족적으로도 크나큰 손실이었다.

▲ 중국 요령성 신빈현 양세봉 장군 석상

남북과 재중 동포사회에서 두루 존경받아

양세봉 장군은 김일성 주석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32년 양세봉과 조선혁명군의 활약은 동만주 안도현 소사하에서 유격대를 창건한 김일성 부대에게도 전해졌다. 김일성은 양세봉과 연계를 맺고자 했다. 일종의 반일 통일전선 차원에서 합작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항일무장투쟁 경력이 오래된 양세봉 총사령의 경험을 전수받고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양세봉 총사령이 김일성 주석의 부친인 김형직과 깊은 친교가 있고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으며, 화성의숙에 소개신을 써 주고 육문중학에 다닐 때는 학비도 보내 준 그런 관계였기 때문이다. 김일성 부대는 남만주 원정을 갔으나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의 완고한 반공주의 때문에 공동전선과 연대투쟁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6년 해방 후 북측 당국에서는 양세봉의 부인과 아들을 평양으로 이주시켰다. 양세봉의 유해는 1961년 평양으로 이전했고, 1986년 신미리 애국열사릉으로 이장한 뒤 묘비를 세웠다.

▲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양세봉 장군이 숨진 후 남만지역 동포들에게는 양세봉 장군의 노래가 만들어져 전승됐다. 양 장군이 활약한 무대였던 길림성 왕청문에는 양세봉의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다. 신빈현의 항일투쟁사를 연구한 만주족 출신 조문기씨에 의해 <압록강변의 항일명장 양세봉>이라는 전기가 출판됐다. 중국 내에서도 양세봉 장군에 대한 평가가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다.

남측에서는 양세봉 장군에 대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허묘를 만들어 기리고 있다. 남과 북 그리고 재중 동포사회에서 두루 존경받는 양세봉 장군 같은 분은 흔치 않다. 그런 의미에서 양세봉 장군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일은 민족이 하나 되고 통일의 초석을 닦는 일이 될 것이다.

노세극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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