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정 기자
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마련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에 노동계와 재계 모두 반발했다.

노동계는 노동권 보호를 목적으로 한 ILO 기본협약 취지와 동떨어지고, 국제노동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개악이라는 입장이다. 특히 사용자가 요구한 사업장 점거 금지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2년→3년) 등 ILO 기본협약 비준과 상관없는 내용이 포함된 것을 비판했다. ILO 기본협약 비준을 시기상조로 여기는 재계도 "노동계에 편향된 안"이라고 주장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ILO 협약 비준하랬더니 협약 위반하나"

노동부는 30일 ILO 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올해 4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 공익위원들이 내놓은 권고안을 바탕으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개정안을 정부 입법안으로 마련했다. 입법예고 기간은 31일부터 9월9일까지다.

양대 노총은 "노동법 개악"이라고 반발했다. 민주노총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라거나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 안"이라는 격한 표현을 썼다. "문재인 정부 노동정책이 파탄 났다"고 했다.

한국노총은 "매우 실망스럽다"며 "지금까지 경사노위에 책임을 미루고 수수방관하다가 고작 마련한 것이 공익위원안이란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라고 밝혔다.

정부 입법안에는 ILO가 지속적·명시적으로 권고한 특수고용 노동자와 간접고용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보장 방안이 아예 빠져 있다. 노조설립 신고와 교섭창구 단일화 강제, 공익사업장 쟁의권 제한, 파업과 민형사 책임 개선 같은 노동계 요구도 포함되지 않았다.

노동부는 실업자·해고자의 노조가입을 허용했지만 사업장 내 활동을 할 때 출입이나 시설사용에 관한 노사합의 절차와 사업장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내용을 개정안에 넣었다. 실업자·해고자의 자유로운 노조활동에 제약을 두겠다는 의도다. 신인수 민주노총 법률원장은 "실업자·해고자도 어떠한 차별 없이 결사의 자유와 조합활동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게 ILO의 확고한 원칙"이라며 "이런 문구는 ILO 권고와 국제노동기준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단협 유효기간 늘어나고, 평화로운 직장점거 불가능할 수도

ILO 기본협약과 관계가 없는 사용자 요구안은 개정안에 일부 반영됐다. 한국경총은 경사노위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에서 △파업시 대체근로 허용 △사용자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규정 삭제 △사업장 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쟁의행위 찬반투표 절차 보완 등 5가지를 요구했다. 정부 입법안에는 이중 사업장 점거 금지와 단협 유효기간 연장이 들어갔다.

노동계는 파업권을 위축하고 사용자 대항권을 강화하는 조치로 봤다. 사업장 점거를 입법적으로 금지하면 피켓팅 같은 평화로운 쟁의행위까지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병원 로비에서 노조가 피케팅이나 구호 같은 노조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사업주로부터 고소·고발을 당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정당한 노조활동마저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정부 입법안이 쟁의권에 대한 과도한 침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ILO 기준적용 전문가위원회는 "사용자를 배제하지 않은 평화로운 직장점거는 적법한 쟁의행위 수단"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김명환 민주노총 위원장은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자본가 요구를 수용해 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은 이미 기울어진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를 더욱더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라며 "정부가 입법을 강행한다면 민주노총은 총파업·총력투쟁으로 막아 내겠다"고 말했다.

한국노총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노조 조합원·임원 자격에 대한 법적 제한, 조합원의 사업장 출입제한, 노조 전임자 활동 및 근로시간면제한도에 대한 입법적 개입은 ILO 핵심협약에 명백히 위반되는 것"이라며 "노동법 개악을 밀어붙인다면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한편 경총은 노동계와 다른 시각에서 반발했다. 경총은 "경사노위가 발표한 권고안은 친노동계 교수 위주로 구성된 공익위원들이 파행적인 운영 과정에서 제시한 노동계 입장에 편향된 안"이라고 주장했다. 또 "경영계가 권고안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정부가 이를 도외시한 점에 대해 유감스럽다"고 밝혔다. 경총은 "생산활동 방어기본권 차원에서 대체근로 허용과 부당노동행위 제도개선을 연계해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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