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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21] 이육사, 칼날 위 삶을 살다간 혁명시인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육사 선생(1904~1944)

시인 이전에 혁명가였던 사람

이육사(1904~1944)는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민족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청포도’ ‘광야’ ‘절정’ 같은 그의 시를 한두 편 정도는 외우는 사람이 많다. 그의 시는 항일 시로서 뿐만 아니라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절제미·서정성을 잘 표현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육사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지만, 그의 치열한 삶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육사는 시인 이전에 투사·혁명가였다.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혁명가로서의 삶을 알아야 한다. 그는 의열단 단원이었고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의 비밀조직원이었다. 그는 40년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서릿발 칼날’ 위에 선 삶을 살았다.

이육사의 시는 그 자체로 뛰어난 문학적 완성도를 갖지만, 그의 삶을 알고 그의 시를 읽게 되면 훨씬 더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혁신유림의 기개·탐구정신을 이어받다

이육사는 1904년 4월4일(음력) 경북 안동에서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5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원록, 후에 원삼, 활로도 불렸다. 진성이씨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어릴 때부터 “한 번 사귀면 생사를 같이 할 만큼 신의와 의리”를 중시하는 선비 정신과 기개를 배우며 자랐다. 특히 그가 태어난 안동 원촌마을은 이웃 하계마을과 더불어 대단한 저항정신을 보인 곳으로 유명하다.

원촌마을에서 육사를 비롯해 그의 형과 동생들이 모두 항일투사로 활약했고 항일투쟁의 주역들이 대거 배출됐다.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의 아버지 허형은 1906년 오적암살 사건에 연루됐다가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허길은 한말 의병장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당한 왕산 허위의 종질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부 허은의 고모이자 독립운동가 허규의 친누이다. 이웃 하계마을의 이만도는 예안의병장으로 일제강점기 단식하다 순국했으며 그의 동생,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도 항일투쟁에 참여했다.

육사는 어릴 적부터 이런 저항정신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2세에 조부가 숙장으로 있던 예안보문의숙에서 한학을, 17세 때 대구 교남학교·영천 백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전통유림의 기개와 혁신유림의 탐구정신을 몸에 익혔다. 육사는 1924년 4월 동경으로 갔다가 이듬해 1월 귀국했다. 그가 일본에 가기 전 1923년 9월1일 동경에서 큰 지진 재해가 발생하면서 조선인들이 대량 살육됐다. 이 사건은 그를 민족문제에 눈뜨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다

육사는 1926년 초 중국으로 건너가 1927년 여름까지 머물렀다. 육사는 북경 어느 대학에 잠시 적을 뒀으나 1926년 가을 광동에서 이활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중산대학에 다니면서 1927년 4월 광주의 가장 큰 한인독립운동조직인 유월(월은 광동의 별칭)한국혁명동지회에 가담했다. 이 조직 간부들은 대부분 사회주의자였고, 육사도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해 4월12일 장개석의 반공쿠데타 후인 8월 육사는 국내로 돌아왔다.

1927년 10월18일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경북지역의 경찰·헌병·관공서 직원 등이 총동원돼 약간이라도 의심스런 행동을 보이던 사람들을 모두 검거했다. 이육사는 형·동생과 함께 체포돼 대구지법에 송치됐다. 이때 그의 미결수 번호가 264번이었는데 이를 따서 호(필명)를 육사(陸史)라고 지었다. 처음에는 ‘죽을 육(戮)’ 자를 써서 육사(戮史)라 썼다. ‘일제 역사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집안 아저씨 이영우의 “땅육(陸) 자를 써라. 이 자는 본래 육(戮)자와 같은 의미다”는 충고를 받아들여 육사(陸史)라는 이름을 쓰게 됐다고 한다.

일제는 형 이원기를 이 사건의 총지휘자, 육사를 폭탄운반자, 동생은 폭탄상자에 글씨를 쓴 것으로 조작하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일본 오사카에서 주모자 장진홍 의사가 붙잡히면서 2년4개월 동안의 옥고에서 풀려났다. 출옥 후 육사는 윤세주가 경영하던 <중외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청년운동에 힘을 쏟았다. 1931년 1월 광주학생운동 1주년을 맞아 항일시위가 일어나자 육사는 주범으로 몰려 구속됐다가 3개월 만에 풀려났다.

군사정치간부학교 졸업과 국내 잠입

1930년대 초반 이육사는 사회주의자가 돼 있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가 민족문제를 계급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회주의적 사고의 혁명가로 발전한 것은 1932년 10월22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교 전후 시기로 보인다. 이 학교는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재학 때 장개석 교장에게 요청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정치군사간부 양성을 목표로 삼았다. 남경 외곽에 자리를 잡은 이 학교는 실전에 응용할 수 있는 능력배양에 중점을 둬 총기사용법 등의 군사훈련과 정치·경제·철학 등 이론교육을 병행했다. 육사는 1기생으로 6개월 동안 비밀통신·선전방법·폭동공작·폭파방법 등 게릴라 훈련을 받고 1933년 4월20일 학교를 졸업했다.

이육사는 이 학교 졸업식에서 공연한 세 편의 연극 중 하나인 <지하실>의 대본을 썼으며 자신이 직접 연극배우로 출연했다. 이 작품에서 드러나듯이 이 무렵 이육사는 계급투쟁·노동운동을 통한 ‘조선의 혁명’을 추구했다. 그가 꿈꾼 ‘조선혁명’은 일제 타도와 함께 노동자·농민이 주인 되는 사회의 건설이었다. 이 무렵 그는 혁명동지 윤세주에게 김원봉이 부르주아계급을 바탕으로 삼은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사상이 애매해 비계급적이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이육사는 상해·안동·신의주를 거쳐 국내로 들어왔다. 그는 간부학교의 차기 교육대상자 모집, 국내 민족의식 환기, 국내 정세 조사 등의 비밀임무를 수행하던 중 1934년 5월22일 서울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같은해 7월20일 일경이 보고한 ‘이원록 소행조서’는 이육사를 “민족공산주의로 전환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시인으로서 혁명활동에 참여하다

이육사는 향후 진로를 고민해야 할 만큼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그는 고민 끝에 시와 글을 통해 민족운동을 전개하는 길을 선택했고, 이후 문학을 통해 치열한 민족의식을 펼쳤다.

1935년 육사는 <개벽>지에 ‘위기에 임한 중국 정국의 전망’ ‘중국청방비사(中國靑幇秘史)’ 등의 정치·역사비평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처음으로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라는 시로 등단했고 ‘해조사’ ‘노정기’ 등의 산문을 발표했다. 1938년에는 ‘강 건너 간 노래’ ‘소공원’ 등의 시를 비롯해 ‘조선문화는 세계문화의 일륜(一輪)’ ‘계절의 5월’ ‘초상화’ 등 평론과 수필을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에 발표했다.

1939년에는 ‘절정’ ‘남한산성’ ‘청포도’ 등의 시와 ‘영화에 대한 문화적 촉망’ ‘시나리오 문학의 특징’ 같은 영화 평론을, 1940년에는 ‘일식’ ‘청난몽’ 등을 <인문평론> <문장>에 발표했다. 1941년 일제의 조선어말살정책으로 민족문화운동은 위기에 직면했고, 그의 건강 또한 극도로 나빠졌다. 그런 속에서도 육사는 ‘파초’ ‘독백’ ‘자야곡’ 등의 시를 썼으며, 중국의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의 50년사’를 초역했다. 그러나 <문장> <인문평론> 등의 잡지마저 폐간돼 글을 발표할 공간을 잃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1942년 사실상의 유고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를 발표했고, 수필·평론·번역 등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한 줌 재가 돼 돌아온 육사

1943년 4월 그는 다시 북경으로 갔다.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고 있던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마지막 열정을 펼치기 위해서였다. 일제 말기 대다수 문인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김희곤의 연구에 따르면 육사가 북경행을 택한 목적은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안의 조선독립동맹을 연결하고, 국내로 무기를 반입해 무력항쟁을 도모하려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김희곤 ‘이육사의 민족문제 인식’)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육사는 1943년 5월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죽은 지 1년 만에 지내는 제사)을 맞아 귀국했다가 7월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돼 북경으로 이송됐다. 영문도 모르고 있던 가족들 앞에 1944년 1월16일 새벽 5시 북경에서 사망했다는 부음이 전해졌다. 막내 동생 원창이 도착했을 때 그의 유해는 북경주재 일본영사관에 의해 한 줌의 재로 변해 있었다. 이육사의 유해는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가 1960년 봄 고향 근처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장됐다.

이육사의 40년 생애는 고난과 역경, 조국의 독립과 평등세상을 향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17차례나 되는 감옥살이를 겪으면서도 그의 투쟁 열정은 지칠 줄 몰랐고, 육체의 한계 상황에서도 쉼 없이 시와 글을 썼으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투쟁의 불꽃을 피우기 위해 나섰다가 한 줌 재로 산화했다.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선 삶이었다.

임영태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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