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애림 노동권 연구활동가

이달 4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근로기준의 시대에서 계약자유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 원내대표 주장에 따르면 신산업 등장과 시장 다변화에 따라 노동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하고 있으며, 이제 노동법규는 4차 산업혁명에 맞는 노동시장 수요에도 부응해야 한다.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적용’ 등은 기존 근로기준법 틀에서의 논쟁이며, 이제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 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4차 산업혁명 등 최신 유행어로 포장돼 있긴 하지만 나 원내대표의 주장은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체제 형성과 함께 등장한 임금노동자가 사용자와 맺은 ‘계약’에 따라 자신을 하나의 상품처럼 판매했을 때 무제한 착취가 벌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19세기에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한 정치경제학자들이 갈파한 바 있다. 이 무렵에 이미 노동운동은 ‘하루 8시간 노동제’와 같은, 계약자유를 제한하는 입법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100년 전 결성된 국제노동기구(ILO)는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고 선언했다. 노동을 상품 거래와 같이 계약자유에 맡겨 둘 수 없으며, “노동시간 규제, 실업 방지, 적정한 생활급 지급, 동일가치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원칙 인정, 결사의 자유 원칙 인정” 등이 각국에서 이행돼야 한다고 천명했다.

나 원내대표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최저임금 현실화나 장시간 노동 규제는 자본의 착취할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니 폐기돼야 하고, 기업인(자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입법이 필요하다는 것일 테다. 그런데 말이다. 예전에 새누리당 유력정치인이 했다는 “그래도 우리에겐 미국 아이가”라는 말마따나 자유한국당이 그리도 신봉하는 미국에서는 지금 4차 산업혁명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노동에 노동법을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일 캘리포니아주 상원 공공 고용 및 은퇴위원회에서는 일명 ‘AB5’ 법안이라 불리는 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동안 캘리포니아주의 판례·실업보험법·임금보장법 등에 산재돼 있던 근로자(employee)와 자영인(independent contractor)의 구분기준을 통합적으로 규정하는 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이 주목받게 된 배경에는 지난해 4월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이 화물운송기사들을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활용했던 'Dynamex Operation West'사의 주장을 배척하고 운송기사들을 근로자로 인정한 판결이 놓여 있다. 이 사건에서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기업이 자신의 종업원을 개인사업자 형식으로 오분류하는 전략으로 인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최소한의 노동조건도 보장받지 못하고, 기업이 자신의 종업원에 대한 사회보험료로 응당 부담해야 할 세원이 줄어들며, 노동법을 준수하는 다른 기업들과의 공정한 경쟁을 저해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AB5 법안은 Dynamex 판결에서 대법원이 제시한 판단지표를 비롯해 지금까지의 판례 및 개별 노동보호법규에 산재돼 있던 진정한 개인사업자의 판단지표(일명 ABC 테스트)를 성문법으로 종합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법안 통과를 둘러싸고 캘리포니아주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우버(Uber) 같은 노무제공플랫폼기업들은 100달러 값어치의 기프트카드를 뿌리며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에 플랫폼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있고, 반대편에서는 RDU(Rideshare Drivers United) 같은 플랫폼 노동자 단체, 전미서비스노조(SEIU)·전미화물운송노조(Teamsters) 등이 연대해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실리콘밸리·플랫폼기업 등 디지털 기술혁신을 선도하는 기업들이 모여 있는 미국의 핵심 경제 지역이다.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그토록 강조한 신산업과 4차 산업혁명의 본거지에서, 새롭게 출현한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최저한의 노동기준을 입법으로 보장함으로써 성장과 공정한 경쟁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의회의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악과 탄력근로제 확대 추진 등 최저 노동기준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만 경쟁하는 우리 국회와 여야를 보면서 만감이 교차할 뿐이다.

노동권 연구활동가 (labory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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