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동훈 공인노무사(노무법인 현장)

“고객들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삶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고 “풍요로운 삶을 꾸릴 줄 아는 지혜와 센스를 가진 사람들”을 고객층으로 하며 “이해관계자에 대한 진실된 태도로 진정성 있는” 사업을 실천하겠다는 어느 회사의 이야기다. 이용한 적 없는 사람이라도 그 이름은 누구나 알 정도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온라인 쇼핑업체다.

지난해 7월 회사가 분사되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구성원들은 회사로부터 분사 과정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해 불안했다. 뭔가 자유롭고 창의적이면서 수평적 조직문화일 것이라 기대했던 그 회사의 단골이기도 한 필자로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회사의 상명하복식 조직문화는 분사 과정이라 해서 다르지 않았다. 구성원들은 분사 이후 회사 이름에서 그룹명이 제외된 것을 걱정했고, 그로 인한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염려했다. 그 과정에서 구성원들은 자연스레 노조로 모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체 구성원의 과반수노조가 됐다.

노조가 설립된 이후 회사가 보인 첫 번째 태도는 무관심이었다. 노조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공식적으로 회사가 분사돼 설립되기 전까지 노조와의 대화를 거부했다. 회사가 말하는 이해관계자 범위에 구성원이나 노조는 포함돼 있지 않았다. 그러니 노조에 대한 진실된 태도라거나 진정성을 기대하는 것은 시작부터 무리였다.

노사관계에서 본격적인 교섭을 앞두고 교섭의 기본적 룰을 정하는 협상을 먼저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합의된 결과물을 흔히 기본협약서라 부른다. 노조가 기본협약서 체결을 요구할 경우 사용자들은 흔히 기본협약서 요구안에 포함된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나 조합사무실 제공 등 몇 가지 절차나 실질적 내용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남다른 지혜와 센스를 갖고 있었다. 기본협약서 명칭부터 시비를 걸었다. 아무런 법적 의미도 없는 문서의 명칭을 “기본”이 아닌 “어떤 조직이나 그 조직의 일을 목적에 맞게 이끌어 경영하겠다”는 취지의 “운영”협약서로 변경해 달라는 것이다. 노조를 대화 상대방이 아니라 관리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은 과도한 것일까?

회사는 법이나 취업규칙에서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 서술방식에 집착했다. 대부분의 단체협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와 문장 서술방식을 낯설어했고, 무지와 이해부족을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면서도 인사권이니 임의적 교섭대상이니 하는 것들은 한사코 법적 교섭대상이 아니라는 유식함을 드러냈다. 회사는 단체협약이 법보다 나은 노동조건을 정하고, 노사관계의 기본적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감았다. 감히 회사 취업규칙보다 일부 나은 노동조건을 주장하는 노조 요구에 의아해했다. 결국 회사는 일체의 노동조건 동결을 주장하는 듯했다.

급기야 회사는 단협 전문에서 “생활조건”을 삭제할 것을 요구했다. 교섭과 무관하거나 교섭 범위를 벗어났다는 이유를 댔다. 우리의 더 나은 일상생활을 책임지겠다는 회사가 구성원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대화조차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모인 노조에서 구성원들의 생활조건을 유지·향상시키기 위해 회사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 대화의 주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회사는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에 합의해 줄 경우 우리같이 좋은(?) 회사에서 노조간부들이 조합 사무실에서 할 일이 없을 거라고 걱정했다. 단체교섭도 근무시간 이후에 2시간씩만 하자고 고집을 부리더니 자신들이 불편해지자 근무시간 중으로 변경했다. 교섭위원 절반이 여성인 교섭 자리에서 회사측 교섭위원은 화를 내며 노트북을 신경질적으로 닫는 등 폭력적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회사가 먼저 제안한 교섭일정은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취소됐다. 그 과정에서 여전히 회사는 노조나 구성원들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제시하지 않았다. 회사측 교섭위원 중 누군가 교섭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면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노조는 조속한 타결을 희망했고, 회사측 교섭위원은 일정 기간 노사관계 분쟁상태를 만든 후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해 가는 치적에 욕심을 부리는 듯했다. 노조는 그룹 이미지와 회사 품격을 기대했고, 회사는 무지와 이해부족으로 이를 거부했다. 노조는 구성원의 자존감 회복과 지속가능한 회사 성장을 함께 논의하자고 했고, 회사는 당장 한 치 앞도 보여 주지 못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을 처리하느라 야근을 하는 구성원들에게 노조가 나눠 주는 피로회복 음료를 회사는 불순한 의도로 보거나 회사의 일과 무관한 듯 여겼다.

이후 퇴사자가 늘어 노조 조합원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회사는 떠나는 구성원들을 붙들 희망을 말하지 못했고, 노조는 떠나는 조합원을 차마 붙잡지 못했다. 회사 홈페이지 곳곳에 “고객”이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구성원들도 자리할 수 있기를, 구성원들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의 삶” 같은 생활조건에도 관심을 갖기를, 노사관계를 운영이 아닌 기본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를 기대하며 1년의 시간이 흘렀다. “풍요로운 삶을 꾸릴 줄 아는 지혜와 센스”는 고객만이 지녀야 할 덕목이 아니다. 노조 설립 1주년이 우울하게 다가온다. 그래도 힘내시라. 그리고 회사는 주변의 평범한 단협이라도 좀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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