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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이 끄집어낸 USR<노조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단상
▲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노조의 사회적 책임(Union Social Responsibility)을 거론했다. 나경원이 말하는 USR은 10여년 전 LG전자가 만들어 낸 개념이다. LG전자노동조합은 2010년 1월 국내 기업 최초로 'USR 헌장'을 선포하며 노동조합 활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한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권익 신장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임도 다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필자는 USR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해 왔다. 노조의 사회적 책임의 진정한 의미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 3권을 모든 노동자들이 두루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데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재벌그룹 대기업의 지원을 받은 이데올로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USR은 2천만 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더욱 심각하기로는 상급단체들과 협력해 비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들의 노동권과 복지 증진을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을 기울인 적이 없다. 재벌의 갑질 문제나 원청의 단가 후려치기 등 우리 사회와 경제의 약자들을 괴롭히는 현안들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도 없다.

재벌그룹 대기업노조들의 USR 활동을 살펴보면 이미 진행 중인 기업의 사회적 공헌활동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예컨대 독거노인 조손가정 가구를 방문해 쌀·김·밀가루·통조림·식용유 등 생필품을 담은 ‘사랑의 부식 박스’를 전달했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모아 매년 1억여원 규모의 저소득층 지원사업을 하면서 독거노인·조손가정에 생활필수품을 전달하고, 집수리를 하며, 기념일 축하 이벤트 같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상의 활동들은 노조의 사회적 책임이라기보다는 노조의 자선활동으로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노조가 기업의 이윤을 자본가나 주주의 주머니가 아닌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도록 역할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이러한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이 더욱 빛을 발하려면 그 기업이 투명경영과 준법 납세로 경제민주화와 사회복지 강화에 기여할 수 있도록 노조가 사용자와 대화하고 교섭하는 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개선되기를 바란다면 세제 개혁을 통해 사회복지에 대한 재벌기업들의 기여도를 높이는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한국에 존재하는 USR은 본질적으로는 대자본의 관용과 지원에 기대고 있다. 기업별노조주의 틀에 갇힌 대기업 정규직노조의 자선과 시혜활동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한 가지 우스운 현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LG전자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기업의 사회적 공헌'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이다. 'social responsibility'라는 영어를 노조에 사용할 때는 '사회적 책임'으로 바르게 해석하는 데 반해 LG전자 기업에 사용할 때는 '사회적 공헌'으로 뒤틀려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공헌은 영어로 'responsibility'가 아니라 'contribution'이다.

이러한 말장난을 통한 이데올로기 조작은 LG전자 노사관계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다. '노경관계'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노사관계를 대체하는 이 말은 노동자가 사용자와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경영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환상을 퍼트린다.

노사관계 선진국에서 일반화된 노동자 경영참가(workers' participation in management)에서 알 수 있듯 노동자도 사용자와 더불어 이사나 감사 등 경영자가 될 수 있다. 경영은 노동과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터에서 노동과 공존하고 상생하는 개념인 것이다. 노사관계에서 노동이 대립하는 상대는 경영이나 회사 같은 무생물이 아니라 사용자(자본가), 즉 살아 있는 인간이다. '노경관계'라는 말은 노동자의 상대로서 인간인 사용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인간들의 행위에 불과한 경영(management)을 놓음으로써 노동과 경영을 대립시키는 이데올로기 조작을 꾀하는 표현일 뿐이다.

유엔 글로벌 콤팩트(UN Global Compact)라는 것이 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이 무엇인지에 대해 유엔의 입장을 정책으로 만든 것이다. 이에 따르면 CSR이라는 지붕은 인권·노동기준·환경·반부패라는 4개의 기둥으로 떠받쳐진다. 인권은 결사의 자유·양심의 자유·표현의 자유·사상의 자유를 말한다. 노동기준은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8개를 말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에 관련된 87호와 98호, 강제노동에 관련된 29호와 105호를 비준하지 않고 있다. 환경의 핵심은 건강하고 안전한 일터다. 반부패의 핵심은 정보공개, 즉 노동자의 정보권 보장이다.

어떻게 보면 노조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은 유엔 글로벌 콤팩트가 말하는 CSR을 자본가들이 제대로 실천하도록 대화하고 협력하고 때로는 투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CSR은 물론 USR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ILO 기본협약 비준을 통한 노동권 확장 문제를 외면해 왔다는 사실이다. CSR은 외국에서 들어온 외래종으로 국내에 들어와 '기업의 사회공헌'이라는 희한한 말로 왜곡됐다. USR은 한국에서 개발한 국산품인데, 베트남노총에 가 보니 한국에서 배포한 영어 매뉴얼이 진열돼 있었다. 베트남노총 간부에게 읽어 봤냐고 물으니, 한국 노조간부들은 읽었냐고 반문한다. 말없이 씨익 웃고 말았다.

글로벌 인더스트리 컨설턴트 (globalindustryconsult@gmail.com)

윤효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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