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나영 기자
서울 마포구에 사는 40대 남성 ㄱ씨. 그는 어느 날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보험에 가입하라는 전화다. 하지만 ㄱ씨는 평소와 달리 전화를 쉽게 끊을 수 없었다. 이어지는 통화 내용이 기존 광고전화와는 차원이 달랐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서울 마포구에 사는 40대 남성은 평균적으로 ○○암에 걸릴 확률이 높으니 ○○암 보험에 가입하라”고 구체적인 근거까지 제시한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ㄱ씨는 마음이 흔들렸다.

ㄱ씨 이야기는 무상의료운동본부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가 4일 오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에서 밝힌 가상 시나리오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ㄱ씨 이야기가 마냥 허구인 것만은 아니다. 인재근 의원이 지난해 11월 발의한 개정안에는 가명처리를 하면 개인건강·질병정보를 당사자 동의 없이 과학적 연구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개정안은 개인 질병정보를 민간기업 이익실현 수단으로 쓰기 위한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오병일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는 “모든 연구는 과학적 방법을 사용한다”며 “민간기업이 신상품 개발이나 고객 분석을 위한 연구도 연구라고만 하면 자유롭게 개인 질병정보를 활용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현정희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장은 “민간보험은 현재 가입자가 3천300만명에 이를 정도로 고성장을 하고 있다”며 “보험사는 고객들을 대상으로 어떤 보험을 팔면 잘 팔릴지, 어떤 걸 빼고 팔아야 이익을 볼지를 판단할 때 이 정보를 이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건의료계는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우려했다. 전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의사는 진료 과정에서 개인이 겪는 크고 작은 이야기들을 다 알게 되고 기록으로 남긴다”며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최근 ‘데이터가 미래산업의 쌀’이라고 했는데, 데이터는 쌀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인 특징과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고 있는, 말 그대로 한 사람 그 자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의 인격과 정체성을 쌀 팔 듯 기업에 함부로 팔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자기 정보에 대한 통제권은 인권의 핵심적인 요소인데, 이걸 부정하고 민간 기업에 영리추구 수단으로 넘긴다는 것은 전 국민들의 동의 없이는 이뤄져서는 안 되는 일”이라며 “정부는 이 법을 청부입법하면서도 공청회나 토론회 같은 공론화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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