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건의료노조
정부가 개인정보 보호법을 개정해 공공기관이 보유한 개인 질병정보 빅데이터를 일정한 조건이 충족하면 본인 동의 없이도 과학적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히면서 민감한 질병정보나 유전체 정보 유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부가 지난달 22일 발표한 ‘바이오헬스 산업 혁신전략’ 얘기다. 보건의료계는 "개인 질병정보를 민간기업 이익실현 수단으로 만든 꼴"이라고 평가한다.

“병원 요구 거부할 환자가 얼마나 되겠나”

혁신전략에는 한 해 4조원 정도를 투자해 바이오헬스산업을 2030년까지 5대 수출 주력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부는 바이오헬스를 ‘의약품과 의료기기 등 제조업과 의료·건강관리 서비스업’으로 정의하며 미래 먹거리로 소개했다. 대부분 산업 분야가 시장 포화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바이오헬스산업을 신성장 산업으로 지목한 것이다. 혁신전략을 시행하면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은 물론 혁신적인 치료제 개발로 국민 생명·건강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빅데이터 구축’에 초점을 뒀다. 100만명 규모의 ‘국가 바이오 빅데이터’를 구축해 희귀난치질환 원인을 규명하고 개인 맞춤형 신약·신의료기술 개발에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암·희귀난치질환 환자 40만명과 환자 가족 포함 건강인 60만명 등의 유전체·건강정보를 수집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같은 공공기관이 보유한 의료빅데이터를 가명 처리한 뒤 민간에 개방해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데이터 중심병원을 지정해 비식별화된 진료기록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신기술 개발에 활용한다. 데이터 중심병원은 본인 동의·해킹에서 안전한 전산 환경에 기반해 운영하겠다고 했다.

시민사회는 개인정보 침해·유출을 우려한다. 환자의 개인 질병정보는 민간기업의 상업적 목적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보건의료단체 한 관계자는 “정부 정책 자체가 민간 대형병원이나 보험사·제약회사 같은 곳을 겨냥해 만들어졌다”며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환자를 비롯한 개인이 질병정보 제공에 동의했을 때만 개방한다는 조건을 달았지만 환자가 의사의 동의요청을 거부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담보로 잡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변혜진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상임연구위원은 “환자가 병원을 찾았을 때 자신의 치료 정보가 어디에 얼마나 활용될지 자세한 설명을 듣고 건별로 동의할 가능성은 적다”며 “개인정보가 신약 개발에 사용될 수 있다는 대략의 설명을 듣고 포괄적 동의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자기를 치료해 주는 병원이 ‘치료받으려면 개인질병정보 제공에 동의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면 환자가 무슨 깡으로 동의를 안 하겠냐”며 “약한 환자를 대상으로 개인정보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부 정책의 생명윤리 점수는 빵점”이라고 비판했다.

민간 보험사도 개인 건강정보 수집 가능

정부가 혁신전략 발표 하루 전인 지난달 21일 공개한 ‘비의료 건강관리서비스 가이드라인 및 사례집’에도 혁신전략처럼 개인 건강정보 활용 방침이 담겼다. 가이드라인은 개인 건강정보의 상업적 활용법을 혁신전략보다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의료행위와 건강관리서비스를 구분하고 건강관리서비스는 비의료기관이라도 제공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건강검진 결과 확인이나 개인동의에 기초한 자료 수집은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으니 비의료기관에서도 할 수 있다고 적시했다.

문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건강관리서비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 질환과 관련한 복약 관련 정보나 병원 방문, 합병증 검사 여부는 건강관리서비스로 민간기업이 수집해 고객 유치·정보 분석에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 앱과 웨어러블 기기, 스마트 혈당측정기를 활용해 이용자가 직접 건강정보를 입력·전송했다면 민간기업에 제공하는 것이 가능하다.

정부는 보험회사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가이드라인 목적 중 하나라는 뜻을 숨기지 않는다. 가이드라인에는 “2018년 9월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본인이 진료기록 사본 등을 온라인으로 요청하고, 온라인으로 제3자(보험회사)에 송부 가능토록 개선했다”는 대목이 있다. 개인정보 송부기관을 ‘보험회사’로 명시한 것이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가이드라인대로라면 보험사가 건강상담을 해 준다고 하면서 앱이나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건강지표를 측정하고 정보를 수집한 뒤 이를 바탕으로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보험 가입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며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보험사와 같은 계열사 병원을 추천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 개인정보를 희생해 기업 이득을 보장해 주는 정책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그는 “민영 의료보험사가 우리나라 의료시스템 전체를 한꺼번에 장악할 수도 있다”며 “나중에는 민영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가는 건강관리를 못 받을 정도로 민간보험 비중이 커져 결국에는 의료비가 인상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부와 시민·사회단체는 개인정보 보호법 개정안을 개인 건강·질병정보의 빗장을 여는 열쇠로 보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돼야 혁신전략에 담긴 공공기관 의료 빅데이터의 개방·활용 등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해 11월 발의한 개정안에는 상업적 목적의 통계작성, 과학적 연구, 공익적 기록보존 등을 위해 본인 동의 없이 가명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의료민영화”

변혜진 연구위원은 “개정안이 통과되면 본인 동의가 없어도 가명 처리된 개인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된다”며 “이 모든 정책의 길목에 개정안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가명 처리하겠다고 하지만 이미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해 온라인에 떠도는 개인정보가 많기 때문에 그런 정보와 결합하면 충분히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개정안 통과 가능성은 높다. 여야의 의견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자유한국당은 당연히 찬성할 내용인데다, 이제 정부가 나서서 한다고 하니 이번 국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가 언제부터 이렇게 뻔뻔해졌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는 정부의 바이오산업 육성정책이 삼성과 무관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혁신전략에 이명박 정부와 삼성경제연구소의 수의계약으로 문제가 됐던 삼성의 미래전략보고서인 2010년 ‘HT(Healthcare Technology) 보고서’ 내용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고 의심한다.

무상의료운동본부에 따르면 삼성은 수년 전부터 신산업 분야로 바이오산업에 주목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최경환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2009년 11월 “삼성전자가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 투자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는 발맞춰 바이오의약품산업과 의료기기산업을 신성장동력산업으로 지정했다.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지난해 7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만난 뒤 갑자기 정부 정책에 바이오헬스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이것이 8대 선도산업에 들어갔다”며 “문재인 정부 역시 삼성의 바이오산업 육성전략을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변혜진 연구위원은 “개인 질병정보는 당사자 소유이기에 병원이 상업적으로 활용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하지만, 백번 양보해서 민간기업이 데이터를 활용해 신약 특허를 냈다고 해도 그 혜택이 환자들에게 돌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질병정보를 제약회사에 넘기면 제약회사가 데이터만 보고 분석하면서 직접 환자에게 임상실험을 하는 절차를 건너뛸 수도 있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기간도 단축되고 비용도 절약되겠지만 환자에게는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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